[노컷뉴스 2007-07-30 09: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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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① '꿈과 믿음이 있는 한 좌절은 없다'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자기 땅 한 뼘조차 없는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 받았습니다. 가난은 ‘한’ 이었고 비참함을 뛰어넘는 ‘비극’이었으며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 도토리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굶주림’ 이었습니다. 간신히 18살 늦은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해준 차비를 들고 올라온 서울, 신문을 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하우스 보이, 구두닦이에 방물장수, 아이스께키 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농촌이 이렇게 가난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당시 농업선진국으로 알려졌던 덴마크 국왕에게 무작정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꿈에 그리던 덴마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결국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됐습니다. 다시 또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농촌개발을 직접 보고 공부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어렵다는 히브리어를 마스터하고 5년 2개월의 최단기간에 최고 우수한 성적으로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참 한편의 소설 같은, 어찌 보면 거짓말 같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건국대학교 부총장까지 지내신 류태영 박사의 얘깁니다. 꿈과 믿음이 있는 한 좌절은 없다고 외치시는 류태영 박사를 7월 25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세상은 달라졌어도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 ▶ 우리나라 최초로 새마을 운동을 도입하셨고 이스라엘의 전문가이자 교육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이신 류태영 박사님을 모셨습니다. 아직도 많이 바쁘신가 봐요. 강의를 자주 다니시나요? 강연도 하고 저서집필도 하고, 하는 일이 많지요. 청소년 지도도 하고 있습니다. ▶ 일흔이 넘은 나이, 연세가 꽤 있으신데 그렇게 많은 일을 해도 괜찮은가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할 수 있으면 기회가 될 때마다 많이 걸으려고 하고 지하철 타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고 일주일에 2,3번은 스포츠클럽에서 러닝머신을 40분 정도 하는 것 같아요. 한 달에 1,2번은 골프를 치고요. 정기적인 운동을 조금씩 하는 거죠. ▶ 학교는 정년퇴직 하셨겠군요? 학교는 명예교수로 있는데 명예교수는 일주일에 6시간을 학교에서 강의할 권리가 있습니다. 월급은 받지 않고 강의를 하면 강사료를 다른 강사보다 2,3배를 더 줘요. 현재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 청소년 미래재단 일도 하시죠? 학교 정년퇴임을 하면서 퇴임식상에서 선언을 했어요. 중고등학교, 특별히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교육훈련을 시켜서 사회의 지도자를 만들겠다고요.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제가 외부에 강의를 하면 강사료, 책을 쓰면 인세(印稅) 등을 모아서 4억2천만 원을 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단을 만든 거예요. 같이 뜻을 동참하여 한 달에 1만원, 10만원, 20만원, 30만원씩 낸 사람들이 600여 명이 됩니다. 지금 기금이 11억5천만 원이 되고, 세워진 이후에 매년 1억5천만 원 정도를 쓰고 있습니다. 그걸로 장학금 주고 학생들 교육 훈련시키는 여러 사업을 합니다. ▶ 지금 몇 년이나 되셨나요? 세워진 지 4년이 넘었어요. ▶ 그 동안에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겠어요? 70-80명 정도 혜택을 받았죠. 졸업생들도 두어 번 나오고요.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고생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그때 일을 생각해서, 물론 그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가 55-56년 전이었는데 시대가 달라졌어도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요. 대부분 가정결손으로 인해서 어려운 사람이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업에 실패한다거나 여러 면에서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 지긋했던 가난의 기억, 주식은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 ▶ 어려운 성장과정을 겪으셨기 때문에 어려운 학생들을 더 생각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향이 어디세요? 전라북도 임실입니다. 거기서도 깊은 산골이에요. ▶ 지금도 고향에 가끔 가시나요? 아직 그곳에 누님 가족이 살고 선친의 묘도 있고 형님과 형수님의 묘도 있고 해서 1년에 한두 번은 갑니다. 고향에 가면 어머님 품속에 간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지고 너무 좋아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가 모두 다 60년 전 제가 자랄 때 만져보고 함께 했던 동네이기 때문에 좋습니다. ▶ 그때의 가난이 지긋지긋하게 기억되지 않으세요? 왜 기억이 안 나겠어요. 하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시절에 모두 겪었고, 그런 것이 거울이 되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서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소망이 생기고 그렇죠. 그 일로 인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일감들이 많아요.말하자면 희망이 없고 용기가 없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한테, 용기와 희망과 꿈을 갖고 살게 하는 좋은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 어린 시절에 농사지을 땅이 없었어요? 다 없는 게 아니고 우리 집이 없었죠.(웃음) 농촌에 있는 땅을 누가 가져가나요, 그대로 있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농토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아요. 농촌에 공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본래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께 교육을 받으면 우리가 양반의 집이라고 문화 류씨라고 합니다. 더구나 충경공파라고 해서 양반 중의 양반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실 때도 항상 뼈있는 자손이다, 가난하고 무식하지만 뼈있는 자손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심어주셨어요. 그래서 선조들의 뿌리를 조사해봤더니 3대조 할아버지 때 마음이 너무 착해서 보증을 섰어요. 그런데 보증을 선 사람이 사업을 함부로 해서, 우리 할아버지 재산이 싹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니 양반이 집안에 앉아 있어야지 얻어먹을 수도 없고 품팔이를 할 수도 없으니까 다른 동네로 가서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지요.요즘도 보면 보증서서 몽땅 망해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8,90년 전 이야기거든요. 집이 몰락을 한 후, 아무리 뼈있고 양반이라 한들 밥은 먹어야죠. 현실적으로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게 된 거예요. ▶ 정말 도토리, 칡뿌리를 잡수셨어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1940년대 이야기인데, 45년 전후로 제가 기억이 많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달 동안, 쌀이나 보리나 수수 등의 곡식을 한 톨도 입에 넣지 못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산에 가서 소나무 겉껍질을 벗기면 흰 껍질이 있어요. 송피라고 하는데 그걸 벗겨다가 삶아서 넓은 대야에, 그 시절은 플라스틱이 아니니까 옹기로 된 대야에 물을 잔뜩 넣고 삶으면 밤색 붉은 물이 우러나요. 그게 독한 거라서 따라버리고 돌로 된 넓적한 절구 같은 데에 주먹 2개 정도 크기 만한 돌로 짓이겨서 갈아요.도토리가루, 수수가루 등을 섞어서 납작하니 호떡같이 만들어서 그걸 먹으면 곡식이 안 들어가고 소나무 껍질만 씹혀서 섬유질만 있잖아요. 그걸 삼키고 도토리 따다 먹고 칡뿌리 캐 먹고 소나무 잎사귀 먹고 쑥 캐서 먹고 그랬어요. 1945년엔 얼마나 어려웠냐 하면 우리 동네가 쑥이 많은 곳이에요. 어딜 가나 쑥이 천지죠. 그런데 하도 사람들이 뜯어먹어서 쑥이 없어요. 저는 쑥을 캐다가 집 근처에 심고 물을 줬어요. 쑥이 자라면 쑥을 캐는 것이 아니라 낫으로 베어서 삶아서 먹는 거예요. 그리고 고구마가 날 때는 잎사귀 두 개 붙은 만큼 잘라요. 아무데나 묻어서 쇠똥이나 개똥 같은 것을 주면 고구마가 열려요. 특별히 우리 집은 고구마가 있는 거예요. 아침도 고구마, 점심도 고구마, 저녁도 고구마, 오늘도 고구마, 내일도 고구마, 고구마만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고구마 못 먹어요. 우리 애들이 고구마 먹자고 하면 너나 먹으라고 해요.(웃음) ◇ 중고등학교는 꿈 같은 곳, 지게 지고 산으로 들로 ▶ 그렇게 어려우신데 학교는 어떻게 다니셨어요? 중,고등학교는 꿈같은 부잣집 애나 가는 곳이고 가봐야 국민학교인데, 요즘 말로 초등학교죠. 그 초등학교 마저 못 다녔어요. 제 위로 누님이 두 분, 형님이 두 분이 있는데 한 사람도 입학한 일이 없어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못 가고 1년 놀다가 아버지가 큰맘 먹고 학교에 입학을 시켜준 것이, 우리 가까운 집안에서 1호에요. 그렇게 가난했어요.8남매 중에 제가 다섯 번째예요. 밑에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 있어요. 제 밑의 동생들은 해방 이후에 의무교육이 되었으니까 다 다녔죠. ▶ 초등학교를 몇 살 때 졸업하셨어요? 제가 호적나이와 실제나이 두 가지가 있는데 옛날 촌사람들은 호적나이보다 실제 나이가 높아요. 제 경우는 1년 반이 틀려요. 왜 그럴까 조사를 했는데, 왜냐하면 옛날에 면사무소에 등록을 하잖아요. 아기를 낳으면 출생신고를 안 했대요. 출생신고 하고 나면 두세 달 후에 아기들이 죽어요. 그러면 출생신고 했다가 서너 달 후에 사망신고 하러 가야 해요. 번거롭고 불편하니까 사는지 죽는지 두고 봤다가, 1,2년 후에 쫄랑쫄랑 기어 다니면 그때 신고하러 가는 거예요. 그래서 면사무소에 가서 우리 아들 등적하러 왔다고 하면 이름이 뭐냐, 언제 낳았느냐 물으면 작년쯤에 낳았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면 서기가 과태료를 내야 한다고 해요. “예끼! 이 사람아, 자식을 낳아서 이름을 올리러 왔는데 무슨 죄를 지었다고 벌금이야?” 그러면 벌금 안 내게 해 준다고 하면서 신고하는 날을 생일날로 해버려요. 그러면 과태료를 안내거든요. 그래서 촌사람들 나이가 다 틀린 거예요.제가 1년 반이 늦는데 덕을 본 것이, 학교 정년퇴임을 늦게 했어요. (웃음) ▶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진학을 바로 못하셨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당연히 못 가죠. 촌에서 지게 지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가고 남의 집 마당, 남의 집 밭, 남의 집 논, 남의 집 돼지 먹이는 생활을 몇 년 했어요. ▶ 그러다가 어떻게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 손에 잡혀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시골의 개척교회는 초가집 벽을 털고 볏짚으로 만든 쌀 가마니를 땅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요. 어른들이 한 20명, 아이들이 20명 정도 되는 교회를 나갔는데 전도사님이 정말로 바른 신앙의 씨를 떨어뜨렸어요.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확실하게 믿게 만들고 그 하나님이 우리가 아닌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믿게 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 세 가지를 저에게 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새벽기도를 하루도 안 빠지고 다니셨어요. 나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같이 기도를 하러 다녔어요. 나중에 나 혼자라도, 단순 반복되는 생활을 하니까 어린 시절에 몇 십 년을 단 하루도 빠진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신앙이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과 소망을 주는 겁니다. 현실은 어렵더라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넘쳐나요. ◇ 18살에 입학한 중학교, 가난한 농촌을 위해 일하리라! ▶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몇 년 있다가 중학교를 가신 거예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 6년 개근상을 탔어요. 한 번도 결석한 일이 없거든요. 그리고 우등상도 타고 반장도 3번인가 했어요. 그런데 반장도 못 하고 우등상도 못 타고 개근상도 못 탄 사람이, 중학교에 올라가서 중학교 모자를 쓰고 방학 때마다 고개 너머로 고향으로 다니러 오는 모습을 볼 때,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몰라요.나는 왜 중학교를 못 가나, 왜 지게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남의 집에 가서 일하고 이렇게 지내는가? 새벽에 하나님께 서원을 올렸어요. 내 일생을 통해서 공부를 끝까지 하겠습니다. 끝까지 한 뒤에 거기서 배움을 얻고 힘을 얻어서, 나라를 위해서 가난한 농촌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했어요. 매일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공부할 여건이 안됐죠. 그런데 하루는 응답을 받았는데, 현실의 상황과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집 모퉁이에 토끼를 몇 마리 키웠어요. 촌에서는 애들이 다 토끼를 키웠어요. 하루는 장날에 토끼 몇 마리를 망태기에 넣어가지고 팔아서 중학교 강의록이라는 책을 샀어요. 중학교 못 간 사람이 집에서 공부하는 책이에요.그걸 가지고 3년 동안 죽어라 하고 공부했어요. 또 초등학교에서는 중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불러서 담임선생이 공부를 가르쳤어요. 거기에 다니기도 했어요.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18살 되던 해에 읍내에 중학교가 생겼고, 어머니가 읍내에서 하는 교회 연합집회에 갔어요. 읍내의 제일 잘 사는 장로님 댁에서, 그날 온 집사님들을 위해서 국수를 삶아줬어요. 가서 보니까 큰 부자거든요. 사모님한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우리 아들 태영이가 있는데 열심히 공부만 하고 어쩌고 하시면서 하소연을 하셨나 봐요. 그래서 집회에 다녀오시더니 내일 한 번 그 장로님 댁에 가보라고 하셔서 갔더니, 이것저것 테스트를 한 끝에 그 집에 있는 10살과 8살짜리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놀아주는 조건으로 그 집에서 밥 먹고 중학교를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18살에 중학교를 가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입주가정교사를 한 거죠.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고등학교가 없어서, 어머니에게 차비를 해달라고 해서 6.25 직후 서울로 올라왔어요.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무작정 올라온 거예요. 여름에 길거리에서도 자고 기차역에서도 잤어요.그러면서 길가에서 구두닦이를 했는데 당시 대방 전철역 앞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고향 사람이 통역으로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 가서 인사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미군 부대 안에서 구두닦이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부대 안 천막 안에서 잘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때가 고등학교 입학시험과 등록이 끝나고 개학한 지 한달 뒤였어요. 내가 서울에 구두닦이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 왔기 때문에 학교를 가야겠어요.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니까 야간학교, 마침 아는 사람이 옆에서 보니까 야간학교를 간다고 해서 따라갔어요. 따라갔더니 노량진 산꼭대기에 동양공업고등학교를 가더라고요. 그 친구는 공부하러 들어가고 저는 교장선생님 방으로 찾아갔어요. 할아버지 교장선생님이셨는데 무릎 꿇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어요. 내가 서울에 구두를 닦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독학을 하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가 없어서 서울에 왔는데, 미군 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하니까 천막에서 자기는 하는데 입학금도 없고 등록금도 없고 입학 시기도 다 지나가버렸지만 입학만 시켜주시면 진도도 잘 따라가고 월사금도 잘 내겠다고 했어요. 교장선생님께서 특별히 허락을 해 주셨어요. 요즘은 말도 안 되죠. 누가 한 달이나 지나서 입학을 허락해 주겠어요? 그래도 어쨌든 그래서 학교를 들어갔어요. ◇ 영양실조에 안 해 본일 없어 “그래도 감사해” ▶ 입학 이후로 월사금은 어떻게 내셨어요? 구두닦이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냈어요. 그거 갖다 내니까 굶어야죠. 많이 굶어서 빈혈증이 걸려서 학교 가다가 여러 번 쓰러졌어요. 어질어질해서 전봇대 붙들고 있다가 가기도 하고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1천 미터, 2천 미터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은 영양실조 안 걸려본 사람은 몰라요. 아스팔트 길도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고, 그런 경험들을 숱하게 했어요. ▶ 구두닦이만 해서는 안 되니까, 다른 일도 하셨다고요?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쓰레기 주워다 팔기도 하고, 못이나 쇳조각 모아다 팔기도 하고, 방학 동안에는 행상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죠. 집에는 제가 대학을 입학하기 전에는 안 간다는 결심을 했어요. 대학을 입학한 뒤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했어요. 대학도 야간대학을 갔지요. 대학을 가려면 저축을 해야 하니까 저축할 수 있는 돈은 먹는 것밖에 없었어요. 밥 주워 먹어봤어요? 저는 너무 배고파서 쓰레기통에서 밥도 주워 먹어봤어요. 연탄재나 모래 묻은 거 털어내고 먹기도 하고, 빵 내버린 거 덜 썩은 부분 골라내서 먹기도 하고. 러닝셔츠와 팬티는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까, 한번 입으면 방학 될 때까지 입었어요. 하얀 옷을 갈아입고 회색이 될 때까지 입는 거죠. 6개월간 입으니까 흰 와이셔츠가 회색이 돼요. 그러면 이른 여름에 한강에 가요. 그때는 비누에 겨가 들어 있고 한강 물이 단물이어서 빨래가 잘 돼요. 그래서 러닝을 빨면 처음에는 검정물이 나와요. 흰물이 나올 때까지 빨아서 걸어요. 또 물속 가슴쯤까지 들어가서 팬티를 벗어서 빨아요. 널러 나갈 수가 없잖아요. 누구 보고 널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한강 백사장이 흑석동 앞인데 그냥 가지고 철교 있는 쪽으로 가요. 그쪽은 사람이 없으니까 교각에 뾰족하게 나와 있는 곳에 널어놓고 물 속에서 안 나와요. 한 두 시간쯤 있다가 나와서 만져보면 아직도 축축해요. 나중에는 물속에 있는 게 너무 피곤해서 축축해도 그냥 입어버려요. 체온으로 말렸죠.(웃음) ▶ 대학 이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구두닦이, 신문배달, 행상을 하다가 대학교 때까지 신문배달을 했어요. 그 다음에 고향 사람을 만나서 공장청소부로 들어갔어요. 야간 대학교니까 오후 4시까지 청소부로 쓸고, 이것도 겨우 연명하죠. 그런데 나중에 공장이 부도가 나서 문을 닫았어요. 공장지기 하는 곳에서 여름 몇 달을 지냈는데, 오도 가도 못하고 월급도 없고 어떻게 하질 못했죠. ▶ 그런 와중에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셨다면서요?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트레이닝을 시키신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고생하던 시절에, 옛날에 일기를 하루도 안 빼먹고 썼는데, 그때 일기를 보면 ‘감사하다’는 말이 가득 찼어요. 요즘 읽어도 내가 은혜를 받아요. 그 시절이 뭐가 감사하겠어요?그런데도 기뻐서 감사하고 굶어 쓰러지면서도 감사해. 왜 그랬냐 하면 어렸을 때 받은 신앙 3가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 내 앞에 계신다는 걸 확실히 믿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을 서울에 와서 생각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내가 왜 굶고 빈혈이 걸리고 길가에서 자고 이러는가?일기장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려고 그런다. 호미나 괭이를 만드시려고 녹슬고 쓸데없는 쇳조각 같은 나를 훈련을 시키시니 얼마나 감사해요. ◇ ‘우리 농촌을 위하여’ 덴마크 국왕에게 보낸 편지 ▶ 덴마크로 가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고1때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했는데 미군부대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유학을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유학이라는 단어를 일생에서 처음 들었어요. 시골에 있을 때는 유학을 간 사람도 없고 갈 사람도 없고 갔다 온 사람도 없었어요. 유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어요. 유학이 뭐냐고 했더니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의 훌륭한 대학에 가서 세계적인 교수한테 공부하는 것이 유학이래요. 공부를 끝까지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으니 나도 간다 생각했죠. 그 다음날 새벽에 대방동 해군본부가 있는 건너편에 대방교회라고 있어요. 그 교회가 완성되기 전인데 지하실에 가서 하나님께서 ‘예스’ 라고 한 마디만 주시면 저 유학 갑니다. 그리고 꽉 믿었어요. 13년 되던 해에 기도하던 중에 응답을 받았어요. 유학을 간다고 하면 막연히 가요. 미국의 하버드, 예일, 아무데나. 유학을 가면 ‘어디로 갈 거냐?’는 질문 이전에 ‘가서 무엇을 배울래?’ 하시더라고요. 가난한 농촌이 잘 사는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배워서 우리나라의 가난을 살려보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느 나라냐? 50년대 유학 하면 전부 미국이에요. 그런데 책을 보면 미국농장이 얼마나 큰지 5천만 평, 100만 평, 거기서 배워서 뭘 써먹을 거예요? 돈 주면서 공부하라고 해도 미국은 아니다 싶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가난한 농촌에 써 먹을 게 없어요.그래서 책을 보고 공부하다 보니까 네덜란드나 덴마크 이런 나라가 있더라고요. 유달영 박사가 쓰신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52년에 입수해서 몇 번을 읽었어요. 덴마크의 가난한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가 되는 과정과 그 이야기를 쓴 책이에요. 나는 공부한다면 덴마크로 간다. 책을 보고 결심하고 나간 거예요. 그 후에 신학대학교에 학사편입을 해서 2년간 성경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나서 경기도 용인에 대안학교를 세워서 교장을 하고 있었어요. 보금농림고등학교라고 대안학교인데 정식고등학교는 아니고, 중학교 졸업한 아이들이 먹고 자고 함께 일하면서 공부하는 학교였어요.그때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을 받은 것인 때가 되었으니 농촌에 대한 논문을 써라. 논문을 써야 사상과 비전이 나오거든요. 그 다음에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2달 걸렸어요. 영어로 다시 번역했는데 아무도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고 밀어준 사람도 없어요. 워낙 거지로 사니까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어요. 영어도 지금 보니까 관계대명사, 전치사 잘못 써서 어수룩해요. 돈 벌기 바빴지 공부를 했어야 말이죠.(웃음) 어떻게 하오리까 새벽에 기도를 드렸죠. 교수도 모르고 목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데, 그럴 바에는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한테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지! 내가 아무도 모를 바에는 높은 사람한테 보내야지. 도서관에 가서 대백과사전을 들쳐보니까 프레드릭 9세가 임금님이라고 써있더라고요. 그래서 서두에 ‘프레드릭 9세 임금님 귀하’ 이렇게 썼지요. 봉투를 만들어서 다 넣고 주소를 쓰는데 왼쪽 위에다 보내는 사람을 나로 쓰고, 받는 사람 쓸 때는 가운데 “To. 프레드릭 9세 임금님 귀하” 이렇게 썼는데 주소를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는 컴퓨터나 이메일도 없고 대사관도 없던 시절이라 결국 못 부쳤어요. 그 이튿날 기도를 드렸어요. 제일 높은 사람한테 보내려고 이름을 알았는데 백과사전을 아무리 봐도 주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답 주시기를 ‘걱정 말아라, 그 나라 편지배달부가 임금님이 어디 사는지 모르겠냐?’ 그렇지! 임금님은 그 나라 서울인 코펜하겐에 살겠지, 그래서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썼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 하면 ‘김서방, 서울, 대한민국’ 인데 편지가 들어가겠어요? 어림도 없죠. 주소를 제대로 썼다 하더라도 국가 원수에게 보내는 편지가 대사관이나 특수기관을 통해서 보내야지, 시답지 못한 놈이 쓴 게 가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간 거예요. 20여 일 지나니까 편지가 회답이 왔는데 왕궁 사무실에서 왔어요. 임금님 보좌관 아무개 해서 사인을 했는데 편지도 A4용지 절반만한 거예요. 영어로 세줄 반. 간단하게 썼어요.“임금님께서 당신의 편지를 읽으시고 감동이 되어, 당신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행정부에 넘겼습니다.” 가만 보니까 중간보고예요. 임금님이 부전지를 써서 외무부장관에게, 국제장학금 관련한 사람한테 보냈나 봐요. 얼마 있으니까 외무성차관보가 사인을 해서 A4용지에 가득 쓴 편지가 왔어요.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내가 뭐라고 쓰겠어요? 10년 한다고 쓰겠어요? 5년이나 한 달을 한다고 쓰겠어요? 원하는 장소를 서울대학교나 고려대학교에서 한다고 하겠어요? 경제학과를 한다, 미술을 한다, 뭐라고 쓰겠어요? 그 나라 대학 이름을 하나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뭐라고 쓰겠어요? 그래서 회답을 뭐라고 썼냐 하면 “먼저 덴마크 말을 속성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과정에 나를 넣어주면 말을 배우는 과정에 정보를 수집해서 갈 곳과 공부할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그랬더니 왕복비행기표에다 초청장과 일본에서 하룻밤을 자야 하는데 호텔 값까지 전부 대 줘서 덴마크에 갔어요. ◇ 3개월 만에 덴마크 말 배워, 비결은 ‘소리 흉내’ ▶ 덴마크 말은 어떻게 배우셨어요? 덴마크 공항에 내리니까 사람들이 덴마크 말을 하는데,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저런 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새떼들이 지저귀는 것 같았어요.(웃음) 외무성에서 귀빈실 의전 대사가 나와서 나를 데려다가 학교에 인계해 주었는데, 기숙사에서 짐을 정리하고 자다가 생각하니까 웃을 일이 아니에요. 겁이 나더라고요. 저놈의 새소리 같은 소리를 언제 배워서 대학에서 공부하냐? 대학은 그 나라 말로 가르칠 테니까. 짐을 다 정리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를 더 이상은 염치가 없어서 뭘 더 해달라는 말을 못하고 속이 터져서 “하나님! 하나님!”소리만 했어요.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뭘 더 달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창세기에 바벨탑이 무너지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더라고요. 거기서 하나님께서 말을 만드셨다고, 그 말이 떠오르면서 저절로 내 입에서 ‘말을 만드신 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여, 내 입의 굳은 혀를 풀어주시고 머리를 명석하게 하셔서 말 배우는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해서 받은 지혜가 참 놀라운 겁니다.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주시는데 “너, 한국말을 어떻게 배웠냐?” 어떻게 배웠어요? 아빠, 엄마, 까까 하면서 배웠어요. 맞다! 막 태어난 아이가 뭘 아냐? 엄마 말소리 흉내 내다가 배운 거예요. 그런데도 정확하게 한국말을 잘 알아요. 문법을 알아요, 뭘 알아요? 그런데 다 한다고요.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흉내를 냈어요. 그러면 얼마만큼 흉내를 내야 하는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기도하다가 노트를 꺼내서 “I am a boy, You are a girl..." 이렇게 영어로 쓰기 시작했어요. 90문장 쓰니까 더 못쓰겠어요. 한 200~300말 되겠네요 했죠. 네가 머리가 모자란다고 하면 하루에 새벽부터 밤까지 몇 마디를 외우겠냐? “I am a boy”를 몇 번을 외우고 쓰면 될까? 10문장을 생각했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하고 외우면 10문장은 외우겠다고요. 그러고 나니까 이 나라 말은 한 달이면 마스터하겠어요. 맞잖아요. 한 달이면 300문장. 그만큼만 외우면 되니까요. 그 다음에 돌아온 말이 어떻게 10말을 다 외우겠냐? 10말을 외우면 7말을 잊어버린 걸로 생각해라. 그래서 3달로 늘렸어요. 죽어라 하고 외우면 900말을 외우거든요. 700말은 잊어버려도 200말은 남잖아요. 3개월 만에 덴마크 말을 마스터했어요.나중에 이스라엘에 유학을 가서도 하루에 10말씩 외웠어요. 3개월에 끝내버리고 3개월 전문용어 외워서 6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봐서 들어갔어요. ▶ 지금도 덴마크 말은 다 하실 줄 아세요? 그때는 덴마크 말로 강연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 40년이 흐르다 보니까 보통 말은 하는데 강연은 못할 것 같아요. 그 나라 가면 한 달이면 회복을 하지요. 말이라는 것은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거든요. ▶ 그래서 덴마크에서 몇 년을 계신 거예요? 2년을 했어요. 나는 학문을 하러 간 게 아니고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부자가 되는지 공부하러 갔는데 2년이면 충분했어요. 그리고는 끝나고 돌아오는 거죠. 한국에 와서 농촌운동을 하려고요. ▶ 덴마크에서 꽤나 유명하셨겠어요? 신문, 일간지, 월간지, 주간지 인터뷰 기사가 났어요. 한국에서는 신문배달은 해봤어도 인터뷰 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죠. 그래서 음식점에 가면 밥값을 안 받아요. 그저께 당신 기사를 봤는데 우리 임금님이 당신을 초대해서 왔다고 왔다, 밥 먹으러 우리 식당에 온 게 영광이라 이거에요. 주말이면 학교 끝나고 산책하러 다니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창문을 열고 ‘류태영 씨! 우리 집에 와서 차 한 잔 해요’ 했어요. 그러면 차 마시러 가서 저녁 먹고 가라고 하면 저녁 먹고 가고 동네 아저씨들이 다 내 친척이었어요. 국왕도 한 번 만났어요. ▶ 국왕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외무성에 가서 인사했지요. 인사만 잠깐 했어요. ◇ 덴마크에서 사막의 개척자 이스라엘로 ▶ 2년 만에 돌아오신 거예요? 덴마크가 너무 잘 살아요. 그 나라에서 무엇을 배웠냐 하면 그때 당시의 시간으로 하면 120년 전에, 아주 가난하고 못 살았어요. 그것을 국민운동을 통해서 그룬트비라는 목사님이 정신운동을 통해서 국민들을 깨우치고 오늘날 세계 1등 복지국가가 된 거예요.덴마크 같은 복지국가가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우선 학교는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일체 등록금이나 입학금이나 수업료 등이 없어요. 전문대학도 기술대학도 돈을 안 내요. 배우는 사람한테 돈 받는 것은 미개한 민족이나 하는 거라는 거죠.전국에 있는 병원이 모두 국립병원으로 시골에 있는 병원도 전부 첨단의료기기가 장치되어 있고 전부 무료에요. 의료보험? 없어요. 수익자 부담? 없어요. 전액무료에요.집이 없는 사람한테는 집을 줘요. 지상낙원이에요. 직업이 없는 사람은 실업수당으로 월급을 줘요.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그러면 매일 놀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노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한번 놀아보라고 해요. 일이 너무 바빴을 때 놀고 싶은 생각이 들지 놀아보면 하루 먹고 하루 쉬고 심심해서 일주일은 몰라도 몸이 근질거려서 못 견디는 거예요. 전부 일하고 있어요.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유학을 가면 그것도 무료에요. 학교나 병원에 돈 받는 창구가 아예 없어요. 외국사람이 가면 랭귀지 과정을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도 무료에요. 우리나라 사람이 몰라서 못 가는 거예요. 우리 학생들 유학시키려고 랭귀지과정을 봤더니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중국, 이런 데서 온 학생들로 바글바글하더라고요. 말만 배우면 대학은 등록금이 없으니까. 그리고 공부를 조금만 잘 해도 장학금을 줘요. 농촌에 가면 자가용 없는 집이 하나도 없어요. 2,3대는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 현실 조건을 배워다가 써 먹을 수가 있어야죠. 그 시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데 건축으로 말하자면 완성된 건물만 자꾸 보고 설계도만 봤단 말이죠. 땅 파고 바짝 일하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스라엘에 육일전쟁이 나서 신문과 TV에 기사가 매일 나는 거예요.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괭이 들고 사막을 개척하면서 일을 한다고요. 거기로 유학 간다 결정했죠. 또 하나님한테 빽을 썼어요. 한 번만 더 ‘예스’ 라고 해 주시면 이스라엘 갑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을 받아서 이스라엘 대통령한테 편지를 썼어요. 난 코펜하겐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있는 줄 알았으면 그쪽을 통해서 했을 텐데 이스라엘로 바로 부쳤거든요. 그런데 대사관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총영사가 나를 만나더니 대통령 특령으로 당신을 모셔오라고 했대요. 왕복비행기표, 용돈, 생활비, 치료비까지 전부 우리 정부가 부담할 테니 와서 공부하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덴마크에서 이스라엘로 갔어요.그때는 학문을 하러 간 게 아니에요. 가서 농촌은 어떻게 지내는가, 6개월 동안 영어로 공부했어요. 정식대학이 아니고 저개발 국가 사람들을 불러다가 공부시키는 국제연수원이 있는데 거기서 현장도 가보고 실습도 하고 그러고 돌아왔죠. 돌아와서 건국대학교의 설립자를 만났는데 제 얘기에 감동을 해서 저를 특채로 뽑았어요. 그때 축산대학생들이 전부 장학생이었어요. 그 학생들의 정신교육을 시키는데 저를 책임자로 임명했어요.그래서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의 생활관 관장을 맡아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때 농촌운동을 다녔어요. 방과 후에는 농촌운동을 열심히 다녔죠. ◇ 결실을 맺은 새마을 운동, 핵심은 “정신개조” ▶ 새마을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KBS 방송국에서 방송하라고 해서 3년간 아침 농가 방송을 했어요. 그렇게 1년쯤 되었을 때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우리나라 농촌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더라고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어요.그래서 덴마크 예를 들고 이스라엘 예를 들고, 우리나라 농촌에서 못 살던 경험과 머슴살이 하던 얘기 등 다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내일부터 여기 와서 농촌운동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학교에서도 농촌운동을 하는데 어떻게 내일부터 여기에 와서 하느냐고 했더니 학교 사표 내라고 하더라고요.곤란하다고, 어떻게 오늘 밤 10시에 사표 내고 내일부터 오겠느냐고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가라고 하대요. 없던 일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돌아오니 12시 반이 됐어요. 아침에 8시쯤 학교에 나갔더니 총장님과 이사장님이 학교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집에는 전화가 없던 시절이니까요. 갔더니 눈이 동그래져가지고 있어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밤 12시가 넘어서 중앙정보부청와대 문교부에서 전화를 걸어서 ‘내일 아침 류태영 선생이 출근을 하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서 청와대로 보내라’고 했대요.그래서 총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사무인계고 과목이고 강의고 아무 걱정 말고 지금 얼른 들어가라고요. 대통령께 말씀 드리라고, ‘건대 총장님께서 우리학교의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보내더라’고 말을 전해 달래요. 가서 보니까 앉을 자리가 없어요. 무슨 계획이 있던 게 아니에요. 나한테 어제 저녁 늦게까지 듣다가 결심한 거죠. 그래서 내가 들어가서 방을 만들게 된 거예요. 급작스럽게 사무실이 나오나요? 일할 사람이 있나요? 일 할 사람을 스카우트하는 거예요. 그때 정정택 장관님이 당시 홍성철 수석 밑에 있었는데 정장관과 함께 다니면서, 사람도 구해서 들여오고 해서 시작된 게 새마을 운동이에요.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 불러다 놓는데 다 나만 쳐다봐요.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래서 덴마크에서 배운 것을 100% 써 먹은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100% 써먹었다는 것이 ‘정신개조’에요. 온 국민이 정신을 의식개조를 하고 정신개조를 해서, 결국 생활개선도 하고 경제발전도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 박사님과 인터뷰를 하다 보니까 1시간으로는 도저히 안될 거 같아요. 새마을 운동 시작한 이야기까지만 오늘 듣고요, 내일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어서 들을 수 있을까요? 네. 그러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