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역경을 극복 하는 지도자
류 태영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
(I)
8.15 해방 이후의 우리 선배들, 특별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부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를 고심한 끝에, 먼저 산업화를 이루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중농정책(重農政策)에서 탈피하여 공업발전 전략을 중심으로 국가의 모든 정책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당분간 농업은 좀 제쳐놓고 국가 경제적 기반을 닦는 것이 급선무란 뜻이었다. 물론 유럽이나 구미의 선진국가에서는 농업기반 산업이 발전한 뒤에 공업을 이르키는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우리도 원칙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의 곳곳에서 현대 세계경제학을 공부하고 온 여러 학자들에게 자문한 결과 공업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국부(國富)를 빨리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중공업정책(重工業政策)을 채택 추진하게 된 것이다.
공업이 먼저 발전해야 한다며 공업을 일으키려고 보니, 민족 자본이 형성된 것도 없고 기술축적 된 것도 없고, 또 지도자도 없고, 사람들의 의욕도 없어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은 제일 먼저 외국에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서 경제 발전의 문을 열기로 한 것이다. 값싼 우리 인건비를 가지고 너희들 재미를 봐라, 너희가 우리나라에서 한 7년 내지 10년 벌어먹은 뒤에는 그 기술을 우리한테 다 넘겨줘라. 그렇게 해서 많은 공단을 세우고 싼 노동력을 제공해서 보세가공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시장성이 없기 때문에 생산 된 제품들은 다시 국제시장에 내다파는 일을 오래 했던 것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이런 식으로 경제개발계획사업을 추진하다 7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나라 농촌에 큰 사건 하나가 생긴 것이다. 바로 대한발(大旱魃)이 일어난 것이다. 60년만의 극심한 가뭄이었다. 모를 심어야 할 봄에, 넉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농촌사회에서는 참담할 정도로 희망이 없었고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나올 정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국가지도자로써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 3월초,
* 최종수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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