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를 아저씨로 부르며 자란 ‘가나 친구’>
아프리카 대륙 중서부 해안 적도지역에 '가나'라는 나라가 있다. 총인구 1천6백만 명에 국토의 넓이는 238.5㎢로 우리나라 남한의 2.4배에 해당하는 땅에 자리한 평화스런 국가다.
이곳에 옵호리 가(家)라는 한 가난한 농가가 있었다. 옵호리(William Kwasi Ofori) 씨는 그 누구보다 국가 발전에 많이 기여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는 7남매를 두었는데, 옵호리 박사(Dr. Issac M. Ofori)가 바로 그 큰 덕을 펴나간 농부의 맏아들이다.
옵호리 박사는 가나의 농림부 장관과 가나 국립대학의 총장, 유엔개발처의 아프리카 지역 담당관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모든 공직에서 퇴임하였으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제간의 심포지엄 등을 주관, 기획 추진하고 있다.
옵호리 박사는 다음과 같은 어린시절을 내게 말해 주었다.
새벽이 오기도 전 온 식구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울타리 밖에서 "아고(Ago)-!"하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연거푸 들려오곤 했다.
'아고'라는 말은 가나 토착어로 "들어가도 좋습니까?"라는 뜻이다. 이 말이 서너 번 들리고 난 후 드디어 안에서 "아메(Ame)-!"라는 대답이 나간다.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다.
그러면 밖에서 '아고-'를 외쳤던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대개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제가 가난해서 이 아이를 도저히 양육할 수 없으니 제발 맡아 키워주십시오"하며 애절한 부탁을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말없이 그 아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옵호리 씨가 집에 들여 키운 아이들이 모두 30여 명이 넘었다.
옵호리 씨와 그의 아내는 평생 동안 수천 평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이 아이들을 친자식과 조금도 차별 없이 양육하고 교육시키며 살았다고 한다.
집에 들어온 아이들은 성년이 될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데, 모두 옵호리 씨에게 아저씨, 그의 부인에게는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자랐던 옵호리 씨의 친아들들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버지를 아저씨, 어머니를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옵호리씨 는 자신의 친자식들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아저씨, 아주머니로 부르게 해서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랬기 때문에 옵호리 박사 역시 그의 아버지가 별세할 때까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했다.
이렇게 옵호리 씨의 정성과 사랑으로 자란 아이들은 장성하여 국회의원을 비롯해 장관, 교수, 고급 공무원 등 사회요직에 많이 진출하였으며 친자식들도 현재 장관, 국회 상원의원, 도지사들로 활동하는 등 가나의 중심체 역할을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난 94년 옵호리 씨는 9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는 2천여 명의 조문객이 장지까지 행렬을 지었다.
한 농민의 장례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대했고, 조문객 가운데는 전·현직 장관들은 물론 총리까지 참여하여 가슴 깊은 존경과 애도를 보냈다. 그들은 바로 옵호리 씨를 '아저씨'라 부르며 자란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석학인 옵호리 박사는 그 부친의 가르침대로 지금도 검소하게 살고 있으며 죽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키며 변함이 없는 인격과 신앙을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그는 국제사회에서 누구보다도 높은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다.
덕을 베풀며 평생을 남과 더불어 살았던 한 농민의 덕망과 노력이 한없이 가난에 찌들었던 그 가문을 세계적인 석학가문으로 일어서게 했고, 나라와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들을 양성했던 것이다.
우리 옛말에 농사 중 자식 농사가 최고라는 말이 있다. 옵호리 씨는 척박한 땅을 사랑하며 일평생을 산 성실한 농부였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농사, 말하자면 사람을 길러내는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으로서 세상에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글_류태영 박사 (히브리대학 사회학박사, 건국대 부총장 역임, 청소년 미래재단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