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 손님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을 데리고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조숙하고 심기가 깊어 책을 가까이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 안정되어 보였다. 얼른 달려가서 할머니의 짐을 들어 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학교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정말 하늘로 날아갈 듯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 아이에게 좋은 교훈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라고 했다. 사실 학생들을 많이 대해서 공부 외에도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곧잘 해주곤 했는데 너무 갑작스런 요청이라 당황스러웠다.
마침 책상 위에 놓여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일기장이었다. 지난 세월을 정리도 할 겸하여 그동안 써온 일기장을 연구실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나이만큼이나 수북하게 쌓인 책들 가운데 중학교 다닐 때 쓴 일기장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 일기장에는 일기와 금전출납부가 함께 있었다. 겉장을 넘겨보았다. 거기에는 1년 동안의 생활목표가 적혀있었다.
1. 하나님을 신봉하며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
2.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3.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친구를 잘 가려 사귀어 장래를 같이 할 수 있는 동료를 지금부터 모으고 희망속에 힘을 길러야 한다.
5. 일할 수 있는 힘은 지(知) 덕(德) 체(體)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다음장에는 ‘하루 한가지씩 착한 일을 하자, 거짓말 하지 말자’ 등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방법들이 적혀있었다.
‘서울역 육교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보따리를 들고 무척 힘들게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바로 그거였다. 착한 일이 어디 큰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일기를 보고 그의 아버지는 “그러니까 목표를 세우고 실천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산을 하셨군요. 그 주의 결산, 그 달의 결산, 그 해의 결산, 그러면 구체적으로 반성도 되고 다시 새로운 결심이 생기셨군요”라고 말하는 사이에 아이는 문화비의 2500환이라고 쓰여있는 금전출납 기록이 더 신기한 듯 그것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가 좀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어린 시절부터 돈을 아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을 한번 보세요. 대학다니는 학생들도 돈의 의미를 몰라요. 심지어는 직장인들도 돈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요즘의 젊은이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장가를 가야만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말도 나오는 거지요. 어려서부터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요.”
그러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교육을 예로 들었다.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엄격히 말하자면 용돈이 없다. 집안일을 돕든, 스스로 아르바이트하여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서부터 돈의 소중함을 배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치와 낭비를 모른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지출계획서와 사용내역서를 작성함으로써 금전관리를 생활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돈의 사용처를 확인함으로써 돈을 절약할 수도 있겠지만 써야 할 곳에 틀림없이 사용했는지 반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기를 제대로 쓰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운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기 쓰는 습관은 어려서부터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삶의 참 의미를 되짚어 볼 수가 있다.
나이들어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추억이다. 추억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삶을 풍요롭게 산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들의 일기장을 보고 그 내용을 참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의 소중한 마음을 잃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기를 잘 쓰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
소중한 것을 얻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서는 아이를 보면서 좋은 추억을 쌓고 풍요로운 인생이되길 빌어 주었다.
글_류태영 박사 (히브리대학 사회학박사, 건국대 부총장 역임, 청소년 미래재단 이사장)
수필원고
<일기는 노년의 추억>-류태영박사칼럼[10]
07/09/03 21:22 |
청소년미래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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