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70부터, 또 다른 도전에 설레는 가슴"
가난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어릴 때부터 숱한 고생을 거듭해온 류태영 박사. 지독한 가난이 대물림 되는 농촌을 바꿔보겠다는 꿈을 늘 꾸어온 류태영 박사.
꿈과 의지로 강하게 단련된 그는 결국 덴마크 왕의 후원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이스라엘 유학도 갈 수 있었습니다. 고생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지독한 고통이 되어 좌절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멋진 사람으로 성장케 하는 연단이 되기도 합니다. <script src="/nocut/takeJs/bestCutNew.js?ver=2007080811635" type=text/javascript></script>
어렸을 적 지독한 고생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인생의 진면목을 배우게 됐습니다. 꿈을 먹고 살았기에 그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 가든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베풀었기에 부족해도 늘 마음이 풍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늘 꿈을 꾸기에 언제나 청년 같은 사람, 류태영 박사! 어제에 이어 7월 26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덴마크 부흥사를 새마을 운동에 담아
▶ 이틀 동안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와대에서 연락을 받고 들어간 후,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셨는데요, 몇 년을 일하셨죠?
2년 있었어요. 맨 처음 들어가서 방을 만들고 사람을 스카우트하는데, 군수 중에 제일 똑똑한 군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지금 충청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정종택(鄭宗澤)장관 얘기를 해요. 내무부에 고등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해서 전남 장흥에서 군수를 하는 사람이라고요. 실장님이 불러오라고 했는데, 그 시절에 어떻게 후임 군수를 임명했는지 사무인계까지 끝내버리고 사흘 후에 청와대에 왔어요.
그리고 농업협동조합중앙회에 전국을 다니면서 농촌을 지도하는 지도과장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이틀 후에 왔고, 농촌진흥청에서 CD(Community-Development, 地域社會開發)요원이라고 지역사회개발요원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일주일 후에 왔어요. 그 다음은 책상도 챙기고 비서도 두고 했는데 다들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나에게 다 묻는 거예요. 그래서 써먹은 것이 앞에서 말했던 덴마크의 부흥사(復興史)였어요.
덴마크는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에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슐리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어요.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른 완전히 망한 상태였죠. 그때 덴마크 국민은 워낙 희망이 없으니까 좌절과 실의에 빠졌고 술을 먹고 길바닥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많았어요.
거기에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라는 목사님이 나와서 정신개조운동을 했지요. 저는 그것을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해 쓴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는데, 덴마크 국민의 입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있었어요. 앉아서 하는 소리가 이 사회가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썩었다, 썩었다’ 정치인도 썩었고, 교사도 썩었고, 세무원도 썩었고, 다 썩었다는 겁니다.
그때 그룬트비 목사님이 하는 말이 ‘썩었다, 썩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 말을 한 사람 중에 ‘자신이 푹 썩어서 이 나라가 이렇게 됐다’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은연중 자기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렇다면 썩었다는 소리가 많이 돌면 돌수록 자기는 계속 빼놓고 얘기 했으니까, 결국 썩은 놈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에요. 귀신이나 썩었지... (웃음)
‘내가 푹 썩었다는 소리는 괜찮지만 남이 썩었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남이 거짓말했다 하지 말고 내가 거짓말했다고 말하자!’ 그래서 사회연대책임의식, 자기책임의식을 개발한 겁니다.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 나부터 달라지는 운동을 한 거죠.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도 만들었어요. ‘전쟁으로 물어준 막대한 배상금을 우리가 단결하여 회복하자!’ 또 하나는 ‘물질적인 손실을 정신적으로 회복하자!’는 거예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썩을 대로 썩어서 지옥문 앞까지 다다랐으니 지옥문에서 돌아서자는 거죠. 우리가 덴마크의 본을 받아 새마을 운동 때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잘살아보자!’는 구호를 내놓은 것처럼 그룬트비 목사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놓았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것은 신앙과 종교심을 가지고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은 성경에도 나온 말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해서 협동운동을 통해 나라가 일어나자는 뜻이에요. 그리고 ‘흙을 사랑하자’는 것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이 생명이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농업을 일으켜서 나라를 살리자는 뜻이었죠.
이 세 가지 모토를 가지고 밀고 나가면서 개척에 이바지한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1828~1894)라든지 교육에 이바지한 크리스티안 콜(Christen Mikkelsen Kold, 1816-1870) 같은 많은 동지들이 따르게 되었죠. 그러면서 덴마크가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과정을 자세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때 썼던 교재, 조직, 교육훈련... 이런 것을 100% 써먹은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 덴마크에서 공부할 때 농촌도 많이 방문하셨을 텐데, 어릴 적 우리 옛 농촌과 비교가 많이 됐겠어요?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사는 것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보다 더 못살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설득력이 있었던 거예요. 지금 현재 우리나라보다 더 못살았던 나라가 우리보다 천 배나 더 잘살고 있으니,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적용된 거죠.
◇ 유 박사의 진짜 박사 도전기
▶ 덴마크 부흥기의 의식개혁운동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해서 새마을운동을 만드셨는데 2년 동안 열심히 하시면서 제일 보람됐던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대통령과 독대(獨對)해서 얘기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저녁 내내 이야기했던 내용을 이튿날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나 방송에서 이야기하는데 제가 했던 말이 그대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 일이 가장 보람 있었죠. 물론 제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국정을 이끌고 나가는 국가 최고의 대통령이 내가 말한 그대로 이야기하니까요.
▶ 2년 후에 우리가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셨나요?
많이 보였죠. 한참 그 운동이 일어나는데 왜 떠났느냐고 하는데 유신과 동시에 저는 떠났어요. 그전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가끔 관련 장관들 서너 명이 와서 대통령께 보고를 하면 제가 배석을 했어요. 대통령이 맨 앞에 앉고, 장관들 앉고, 그 뒤에 비서관들 앉고, 맨 뒤에 제가 앉아서 슬라이드를 보는데 대통령이 한참 듣다가 ‘유 박사!’ 부르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유혁인 정무 제1수석 비서관이 ‘네’ 하면서 갔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당신 말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저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물어보시는 것을 조목조목 대답했더니, 그 다음부터 소문이 나서 모두들 나를 부를 때는 대통령 목소리를 흉내 내서 ‘유 박사’ 그랬어요. (웃음)
한번은 문교부 장관이었던 고(故) 민관식 장관이 문교부 발전대회를 한다고 전국에 있는 교육감, 대학교 총장들, 교장들 몇 천 명을 불러다 놓고 청와대 대통령이 와서 한 말씀 해달라고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대통령이 저를 대신 내보내라고 해서 제가 장관 옆에 앉아있다 장관으로부터 소개를 받는데,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분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새마을 운동을 지도하고 보좌하시는 류태영 박사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 그땐 박사가 아니셨잖아요. (웃음)
그래서 제가 마이크에 대고 ‘저는 박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를 박사라 부르지 말고 유 비서관이나 유태영 선생으로 불러주기를 바랍니다.’하고 10분 동안 기조연설을 했어요. 그랬더니 끝나고 교육감과 대학 총장들이 올라와서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악수를 하면서 ‘요즘에 박사도 아닌 것이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유 박사님은 박사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니 얼마나 겸손한 박사님입니까. 진짜 박사십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면 전부 저를 박사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때 가슴이 뜨끔하더라고요. 그때야 제가 청와대의 서슬 퍼런 권력 아래 있으니까 누가 아무 소리도 안 하지만, 언젠가는 청와대에서 나올 텐데 ‘저놈 가짜 박사다!’ 할 거 아녜요. 그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뜨끔하면서 빨리 박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난번에는 박사를 공부하러 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이 어떻게 살면 되겠는지 그런 실무적인 공부 하러 갔거든요. 이제는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학문의 체계를 잡는 박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스라엘 외무성에 편지를 했어요. 전에 외무부장관이 언제든지 공부하러 온다면 장학금을 준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정말 장학금 준다고 회답이 왔어요.
▶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분이 간다니까 더 좋아했겠네요. (웃음)
더 좋아했죠. ‘그런데 저는 월급이 적으니까 차비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다.’라고 편지를 했더니 차비도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청와대에 정식으로 보고를 했는데 지금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어디를 가느냐고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설득을 했죠. ‘새마을 운동을 이만큼 했으니 학문적인 체계와 이론적인 체계가 필요하다, 내가 가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오겠다.’
육영수 여사가 저를 따로 부르더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가느냐고, 대통령님이 유 비서관만 믿고 있는데, 그리고 이렇게 인기 있을 때 여기서 한자리를 해야지 그냥 나가면 되느냐고.’(웃음) 가서 공부 몇 년 하면 잊어버린다는 거였죠.
▶ 흔들리지 않으셨어요?
전혀. 유신 때 유신의원이라고 국회의원을 임명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이름도 육영수 여사가 넣었더군요. 그래서 저는 안 한다고 빼라고 했죠.
◇ 3개월 만에 히브리어를 끝내고 3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
▶ 혹시 이스라엘 가시기 전에 고향에 금의환향은 안 하셨어요?
고향에 가끔 방문하면 경찰서장부터 막 동네가 야단이 났어요. 머슴살이한 저희 아버님을 제일 상석에 앉히고 그런 때도 있었죠.
▶ 만류도 뿌리치고 결국 이스라엘로 가셨는데, 그게 언제인가요?
제대로 학문을 하러 간 때가 1973년 7월이었어요.
▶ 히브리어는 덴마크에서 하셨던 식으로 하신 건가요?
그렇죠. 이제는 학문을 해야 하니까 히브리어로 강의를 하는 대학에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외국인이라고 영어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3개월 만에 히브리어 다 끝내버리고 3개월 더해서 6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봤어요. 믿는 사람은 믿을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더라고요. 저는 결심을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나갔거든요.
히브리어는 덴마크어 보다 더 힘들었어요. 한국에 없는 발음이 많아요. 목에 걸린 생선가시 뱉어내는 목구멍소리가 많아서. (웃음) ‘엄마, 아빠, 까까, 쉬’ 하다가 말을 배우듯이 이스라엘 아이들도 엄마가 내는 소리를 흉내 내다가 이스라엘 언어를 배우잖아요. 흉내 내면 못 배우겠나 싶어서 3개월 만에 끝내버렸어요.
▶ 6개월 동안에 전문용어까지 배우고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없었어요. 사회과학대학에서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대학입학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생 둘과 인터뷰를 한 시간 했어요. 또 과장하고 주임 선생하고 번갈아 가면서 물어요. 어떻게 자랐는지, 생활환경은 어떠했는지, 왜 왔느냐, 뭐 배우러 왔느냐고 묻다가 나중에 사회학에 대해서 학자들 몇 사람 묻더라고요.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 머튼(Robert K. Morton, 1910~ ) 등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데 용케 제가 아는 사람만 묻더라고요. 대답했더니 한참 묻다가 과장이 옆에 사람보고 ‘당신은 한국에 가서 6개월 만에 한국말로 이 사람처럼 말 할 수 있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서로 안 된다며 자기들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들어갔죠. (웃음)
▶ 그래서 어느 대학을 가셨나요?
예루살렘히브리대학(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에서 농촌사회학을 전공했어요. 교수가 25년 만에 기록을 깼다고 그래요. 히브리어를 배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니까 별도의 문제고 보통 석사 하려면 인문사회과학은 3년 걸리고 자연과학은 2년 정도 걸려요. 박사 하려면 석사하고 나서 5년 있어야 하니 총 8년이 걸리죠. 그렇게라도 끝내면 빨리 끝낸 것인데 저는 4년 만에 석사, 박사를 수석으로 끝냈어요.
◇ 인스턴트 지식을 벗어난 유대인식 삶의 지혜
▶ 어제 제가 5년 반이라고 그랬는데... 죄송하게도 1년이나 늘려서 소개했네요.
이수하는 과목의 평균점수가 89점, 92점이었어요. 그곳은 공부 잘한다고 대통령상, 우등상, 총장상이 따로 없고 학위증서에 글자 한 자 써주는데 영어로 번역되면 ‘With distinction’이라고 우리말로 ‘빼어나게 구별된 성적으로’라는 단어 하나하나를 써줘요. 지도교수가 제게 금년에 이 글자를 써서 받은 사람은 저 하나라고 했으니까 제가 일등이죠.
덕분에 국립대학인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Ben-Gurion University of the Negev)에서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교수로 초빙해 주어 이스라엘 언어로 사회학을 2년 가르치다가 돌아왔어요.
▶ 이스라엘과 덴마크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덴마크는 150년 전에 있었던 것이고 이스라엘은 지금 말하면 30년 전에 일어난 얘기인데, 같은 점은 신앙을 가지고 정신적인 운동이 일어난 나라라는 점이에요. 다른 점은 주위의 환경과 역사적 배경이죠. 덴마크도 전쟁을 많이 하면서 망한 나라였고 이스라엘은 계속 전쟁 중에 있는 나라예요. 이스라엘은 사막이고 덴마크는 사막은 아니지만 황무지였죠. 이것을 개척하고 나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이스라엘은 키부츠(Kibbutz, 집단농장)와 모샤브(Moshav, 공동농장)의 집단농촌이고 덴마크는 일반 보통 가정의 개인농장이죠. 정신개혁운동도 덴마크에는 포크 하이스쿨(folk high school, 평민학교, 전형적인 성인 기숙학교 유형)이라고 하는 곳에서 정신교육운동을 했고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운동(Zionism,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서 정신교육운동으로 나가게 된 것이에요. 두 나라 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되 덴마크는 목사들이 주동이 되어서 농촌운동을 했고 이스라엘은 랍비들이 주동이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축이 된 것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보통 유대인 그러면 교육에 대해서 세계최고라고 하는데 직접 가서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유대 가정의 교육은 우리와 어떤 점이 다르죠?
교육적인 측면에서 다른 분명한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으로 알고 있고 이스라엘은 지혜를 가르치는 것을 교육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을 시켜요.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외우는 것을 많이 했죠. 60년 전에 외웠던 조선시대, 고려시대 역대 임금을 지금도 외우잖아요. 수학공식,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등 이런 공식이나 정의를 많이 외우는 것을 우리는 공부라고 하죠.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공부를 아예 안 시켜요.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보니까 산수교과서가 우리말로 I․Q 테스트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25+15, 125÷25’ 하는 문제들이 교과서에 나와요. 하지만 이스라엘 교과서에는 ‘두 자리 수를 두 번 더하는 문제를 10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세 자리 수를 두 자리 수로 나누는 문제를 열 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정수를 소수로 나무는 문제를 몇 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어렸을 때부터 문제를 자기가 만들게 해요. 삼각함수 같은 것도 몇 도와 몇 도를 더해서 어떻게 되는지 문제를 몇 개 만들어서 풀어보라는 식으로 전부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말하자면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 아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손가락으로 ‘갑자을축’ 하듯이 꼼지락 대기에 주역을 배웠나 했어요. 이스라엘도 음력을 쓰거든요. 그리고 소띠다 개띠다 하는 태어난 해에 따른 간지가 있어요. 우리와 12마리 짐승 중에 4마리만 다르죠. 우리는 없는 곰 띠, 전갈 띠 같은 게 있거든요. 그리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나이든 사람은 궁합을 봐요. 가만히 그 말을 들어봤더니 남녀가 4살 터울로 결혼하면 좋다는 그 소리더라고요. 무슨 띠와 무슨 띠가 만나면 좋다는 말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사주팔자를 배운 줄 알았어요. (웃음)
그래서 뭐하느냐고 하니까 일곱을 일곱 번 더하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구단 안 배웠느냐고 물어보니까 구구단이 뭐냐고 물어봐요. 안 배웠다고 하기에 구구단을 적어놓고 외우게 했더니, 다른 아이들은 안 하는데 자기만 한다며 싫다고 하더라고요. 거기는 한 달에 한번 의무적으로 학부모들이 와서 받는 교육이 있는데, 담임선생에게 이스라엘은 구구단도 가르치지 않느냐며 물었죠. 구구단이 뭐냐고 선생님도 묻기에 으쓱해져서 가르쳐줬더니 놀라워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거예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계산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계산기를 안 준다는 거예요. 애쓰며 계산하는 가운데 생각을 하고 창의력이 생기고 인간이 되어간다는 거죠. 외워서 쓰고 그러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더라고요.
미국에 파견을 나가보니 영국은 15단까지 외우고 인도는 19단까지 가르치던데 여하튼 이스라엘은 암기식으로 정보를 입력시키는 교육을 안 해요. 그러니까 집에서 숙제를 하다가도 엄마에게 질문하면 직접 대답하는 엄마가 하나도 없어요. 간접적으로 반대질문을 해서 깨닫게 해주지 절대 정답을 말해주지 않아요. 사지선다형문제는 있지도 않고 대학에서 시험을 보는데 시험문제가 타자로 10줄이에요. 예를 들고 ‘그래서 이 내용에서 볼 때 네가 생각하는 사상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문제만 파악하는데도 힘들어요. 어떨 때는 노트를 10장, 20장 줘가면서 두 시간, 세 시간도 시험을 봐요.
▶ 창의력을 보는 거네요.
창의력과 자기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점수를 따는 거죠. 정답이 없고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응용해서 각자가 풀어나가야 해요. 제가 예루살렘대학에서 첫 번 학기에 점수를 가장 많이 받았던 과목의 예를 들어 보면, 한번은 제 지도교수가 책을 하나 주면서 읽고 와서 다음 주에 발표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받아보니 스펠링은 알파벳인데 영어가 아니더라고요. 물어보니 스패니쉬(Spanish)래요. 그래서 스페인어는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더니 스패니쉬는 쉬우니까 그냥 읽어서 오라는 거예요. 저는 교수님이 미쳤나 했어요. 그러다 지혜를 얻은 것이 이곳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있는 유대민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보내는 학교니까 분명히 스페인에서 유학 온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스페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온 학생이 있어서 제목과 각 장(章, chapter)을 읽게 했더니, 아는 책이었고 두 장만 없더라고요. 그래서 스페인어로 된 두 장을 이스라엘말로 읽게 하고 한국말로 받아 적어서 그 다음 주에 발표를 멋지게 했죠. 그러니까 지도교수가 최고의 발표점수를 주면서 스페인어 못한다더니 어떻게 했느냐고 묻기에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모르는 학문의 책 재료를 주면 어떻게 소화하는가?’ 그것이 문제였고 그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시더라고요.
뭔가를 줬을 때 방법을 주면 안 돼요.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통해 스스로 방법을 체득하면 엄청남 자신감을 갖게 되고 해결하는 방향에 있어서 다른 일도 그렇게 한다는 거죠. 또 한 번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반 페이지 분량의 문제가 나왔어요. 선생님 강의를 모두 외웠다고 하더라도 뭘 써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그 시험에서 최고 점수인 97점을 받았어요.
첫마디에 그저께 읽은 이스라엘 신문의 기사를 썼는데, 이스라엘에서 애를 낳고 살던 사람이 미국에 가서 미국여자와 결혼해 10년 동안 오지도 않고 소식을 끊어버렸다가 10년 만에 왔는데 애들 데리고 사느라고 홀로 고생한 아이 엄마가 남편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경찰에 고발을 해서 재판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면서 징역판결이 나와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大書特筆)이 났죠. 이 얘기를 쓰고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사회제도와 법률공조 이런 것이 안 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선생님의 학설을 죽 풀었더니, 천편일률적인 다른 학생들의 답에 반해 저만 다르니까 이런 것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다른 애가 배우니까 피아노학원 간다고 하면 절대 안 보내지만 ‘엄마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찡해. 그래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싶어요.’ 하면 보내는 거예요. 누가 하니까 한다고 하는 것은 절대 안 보내죠. 그것이 교육 속에 스며들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오직 일렬로 줄을 세워서 일등 하고, 반장하고, 다 대통령 되기를 바라죠. 그럼 국민은 누가 하나요. (웃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하늘이 준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교육이에요.
◇ 성공으로 가는 길은 나만의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
▶ 유대인은 예술분야에서도 뛰어나고 돈 버는 데도 뛰어난데 그런 것들이 교육과 무관하지는 않겠어요.
노벨상을 받은 전체 수상자의 26%가 유대인이라고 해요. 그리고 노벨 의학상, 화학상 같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60%래요. 세계적으로 돈이 가장 많은 민족도 유대인이고 전쟁을 잘하는 것도 유대인이죠. 예술가, 음악가도 많고 학자도 많아요.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 샤갈, 다 유대인이고 세계적 음악콩쿠르도 다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서로 다른 달란트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아무리 돈을 잘 벌거나 바이올린을 잘해도 영어, 수학 못하면 바보취급을 받고 엄마들 입이 ‘욕 기관총’이 돼서 마구 난사 되잖아요. (웃음) 다른 달란트를 받았어도 기가 죽어 버리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공부 못한다고 절대 욕하는 엄마가 없어요. 그러니까 있는 재능들이 다 살아나죠.
▶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33살에 했어요. 제가 구두닦이하고 신문 배달하니까 다른 여자들이 저에게 관심을 둘 수도 없었죠. 그런데도 저는 속도 없이 다른 여자를 좋아해 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만 당했어요. 그러던 끝에 시골에서 교장선생님을 하시던 장인어른이 가난하지만 서울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저를 너무나 아껴주셨어요. 집에만 가면 밥을 해주시고 이야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장인어른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그 중에 셋째 딸과 마음이 통해서 결혼을 했죠. 처음에 결혼한다고 했더니 장모님이 절대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는데, 나중에 딸을 낳고 키워보니 그 마음을 알겠더군요. 바지는 떨어져가지고 엉덩이가 해어져서 살이 보일락 말락 하고 다니지, 제가 속도 없이 그러고 갔어요. 게다가 들어보니 나중에는 가정교사를 했지만 신문배달에 구두닦이나 하고 앉았지, 굶기를 밥 먹듯 하지, 아버님은 머슴 살았지, 누가 교장선생님 딸을 거기다 넣겠어요.
그래도 우리 둘은 결혼하기로 작정을 해서, 우선 친구들이 돈을 모아 달동네에 월세 방을 얻어줬어요. 장인어른도 장모님에게 꽉 잡혀서 결혼식에 오지도 못하고 집사람은 드레스도 못 입고 을지로입구에 있는 흥사단 강당에서 무료로 결혼식을 했어요. 한복에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구멍 뚫린 망사 화분 받침대를 뒤집어쓰고요. (웃음)
택시를 대기시켰다가 탔는데 그때 당시 신혼여행을 가면 속리산이나 온양온천을 가니까 택시기사는 횡재다 싶어서 기다렸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기본요금 올라가기 전에 내리자며 미도파 앞에서 내렸어요. (웃음) 3분 거리라 욕을 바가지로 할 텐데 신랑이 얼마나 가난해 보였으면 그냥 내려주더라고요. (웃음) 명동의 한일관에 가서 제 돈 내고 사먹는 음식으로는 제일 비싼 떡만둣국을 둘이서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안양에 갔어요. 6월이라 안양유원지에도 가고 여관에 가격을 물어보니 아까 먹은 떡만둣국 열 그릇 값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붕이 손에 닿을 듯한 여인숙에 가서 제일 싼 방을 달라고 했는데 바로 앞에 항아리로 만든 뒷간이 있고 얼마나 안 치웠는지 오물이 넘쳐서 구더기가 올라오다 떨어지고 있더라고요.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여인숙에서 잠자고 집에 돌아온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예요.
▶ 신부가 안 울었어요?
미리 각오를 했지요. 거지인데요 뭐...
◇ 두 여인에 의해 좌우되는 남자의 일생
▶ 덴마크 가기 전인데 덴마크는 같이 가셨어요?
남자는 일생을 통해서 여자를 둘 만나요. 하나는 어머니고 다른 하나는 부인이죠. 그 두 여인이 생애를 좌우합니다. 어렸을 땐 어머니의 교육, 성장한 뒤에는 부인이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협력을 통해서 사람을 바꿔 놓아요. 저는 우리 집사람이 저를 만들었다고 말해요. 저를 박사로 만든 것도 집사람이에요. 덴마크 공부하러 갈 때도 나만 초청장을 받았는데, 아기는 생기고 대책은 없고 당황하고 있는데 가라는 거예요. 아기를 업고 길가에서 떡 장사를 하더라도 살 테니 가라고. 얼마나 용기를 줬는데요.
▶ 고생이 엄청났겠어요.
엄청나게 했죠. 굶기를 밥 먹듯 하고.집에서는 시집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서 고생한다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어요. 지금도 저는 우리 집사람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웃음)
▶ 2년 만에 돌아오신 후에는 생활이 좀 나아졌나요?
조금 나아졌는데 그때 대학교수 월급이 워낙 박봉이다 보니 제가 가르쳤던 학생이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일 년이 되니까 저보다 월급이 더 많더라고요.
▶ 처가에서는 언제 인정을 받으셨어요?
청와대 들어가서요. (웃음) 장모님이 기뻐하면서 친척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난리가 났었죠.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가니까 정부에서 사람이 나오고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오고 막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쭐해가지고 대접을 받았지요.
▶ 이스라엘은 가족이 함께 가셨나요?
네, 큰애가 딸이고 밑으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만 5살, 3살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초등학교 상급반까지 유대인학교에 보냈어요.
▶ 거기서는 고생을 좀 덜 하셨나요?
한국보다는 덜 했지요. 그러나 저 한 사람만 주는 장학금으로 가족이 살려다 보니까 정부에서 방도 주고, 전기요금 같은 것도 다 내줬지만 아내가 부업으로 일도 하고 그랬어요.
▶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하셨나요?
학원이나 과외에 보낸 적은 없고 가정교사 한번을 둔 적이 없어요. 한번은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저에게 와서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봐요.’ 그래요. 자기 반의 친구가 내내 일등만 하다가 3등으로 떨어져서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고 퉁퉁 부어서 왔는데 자기는 4등 했다, 15등 했다, 7등 했다 하는데 한 번도 뭐라고 않는 것을 보니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는 그런데 별로 관심 없고 네가 친구를 잘 사귀는지, 인간성이 제대로 되는지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다. 친구들과 떡볶이 사먹으라고 돈을 자꾸 주는데 붕어빵도 사서 나눠 먹으며 친구도 만들고, 인간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나라를 생각하고, 신앙심이 좋고, 부모를 공경하고, 바른 마음먹고 그런 것들. 공부는 하는 데까지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대신 네 선택에 맞게 행동하며 살아라.’ 그랬어요.
◇ 고통과 역경의 불로 단련된 인생 칠십, 새로운 시작
▶ 잘 자랐나요?
입시 때 카이스트가 특차니까 시험을 보러 간대요. 저는 대학교수니까 대게 대학교수들은 아들이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서 건국대에 오라고 했더니 특차니까 한번 본다고 해서 보냈더니 합격을 한 거예요. 건국대 보내려고 반대했는데 본인이 가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니 그냥 보냈죠. 가서 수석으로 석사․박사 다하고 지금은 교수로 재직 중이에요. 딸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도 보냈는데 거기서 사귄 사람과 결혼했어요. 지금은 남편이 영국으로 발령받아 영국에서 살고 있어요.
▶ 지금은 형편이 많이 좋아지셨나요? (웃음)
그럼요. 아이들 집도 다 마련해주고 신혼여행에서는 집사람을 안양의 여인숙에서 재웠지만 지금은 세계 일주 7번에 63개국을 방문하고 외국에서도 6,7년을 살았죠. 부부간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협력을 하면 무에서 유로 다 이루어지더라고요.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주 신앙적이고 성실하셨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 많이 도와주시다 91세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 혹시 좌절해 본적도 있으세요?
없어요. 그 부분이 늘 하나님께 감사해요. 시골 대장간에 가면 낫이나 호미를 잘 만들기 위해 뜨거운 불에 많이 담금질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제 삶도 어려움과 고통 속에 많이 담금질 되면서 더 훌륭한 삶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합니다.
이라크에 가서 미국정부의 허락 없이 로비 활동했다고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미국에 수감되어있는 유명한 로비스트 박동선 씨와 선언한 것이 있어요. 70살이 되었을 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그 동안 연구한 성과와 그 동안에 보아오고 느낀 것들을 가지고, 그때부터 진짜 일을 할 ‘준비’가 끝난 것으로 하자고... 그래서 저는 지금이 시작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청소년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의 교육, 의식, 행동, 품행, 이런 것들이 나라의 운명과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어요. 청소년들을 제대로 교육, 훈련시키는 것과 새마을 운동을 했을 때처럼, 국민들의 의식개혁을 통해서 개별로, 집단별로, 국가별로 이 나라가 잘살게 하는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이 제 꿈이고,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입니다.
언제나 청년의 마음으로 꿈꾸는 류태영 박사
[ 2007-07-26 20:57:19 ]
꿈과 의지로 강하게 단련된 그는 결국 덴마크 왕의 후원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이스라엘 유학도 갈 수 있었습니다. 고생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지독한 고통이 되어 좌절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멋진 사람으로 성장케 하는 연단이 되기도 합니다. <script src="/nocut/takeJs/bestCutNew.js?ver=2007080811635" type=text/javascript></script>
어렸을 적 지독한 고생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인생의 진면목을 배우게 됐습니다. 꿈을 먹고 살았기에 그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 가든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베풀었기에 부족해도 늘 마음이 풍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늘 꿈을 꾸기에 언제나 청년 같은 사람, 류태영 박사! 어제에 이어 7월 26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덴마크 부흥사를 새마을 운동에 담아
▶ 이틀 동안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와대에서 연락을 받고 들어간 후,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셨는데요, 몇 년을 일하셨죠?
2년 있었어요. 맨 처음 들어가서 방을 만들고 사람을 스카우트하는데, 군수 중에 제일 똑똑한 군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지금 충청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정종택(鄭宗澤)장관 얘기를 해요. 내무부에 고등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해서 전남 장흥에서 군수를 하는 사람이라고요. 실장님이 불러오라고 했는데, 그 시절에 어떻게 후임 군수를 임명했는지 사무인계까지 끝내버리고 사흘 후에 청와대에 왔어요.
그리고 농업협동조합중앙회에 전국을 다니면서 농촌을 지도하는 지도과장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이틀 후에 왔고, 농촌진흥청에서 CD(Community-Development, 地域社會開發)요원이라고 지역사회개발요원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일주일 후에 왔어요. 그 다음은 책상도 챙기고 비서도 두고 했는데 다들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나에게 다 묻는 거예요. 그래서 써먹은 것이 앞에서 말했던 덴마크의 부흥사(復興史)였어요.
덴마크는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에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슐리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어요.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른 완전히 망한 상태였죠. 그때 덴마크 국민은 워낙 희망이 없으니까 좌절과 실의에 빠졌고 술을 먹고 길바닥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많았어요.
거기에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라는 목사님이 나와서 정신개조운동을 했지요. 저는 그것을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해 쓴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는데, 덴마크 국민의 입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있었어요. 앉아서 하는 소리가 이 사회가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썩었다, 썩었다’ 정치인도 썩었고, 교사도 썩었고, 세무원도 썩었고, 다 썩었다는 겁니다.
그때 그룬트비 목사님이 하는 말이 ‘썩었다, 썩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 말을 한 사람 중에 ‘자신이 푹 썩어서 이 나라가 이렇게 됐다’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은연중 자기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렇다면 썩었다는 소리가 많이 돌면 돌수록 자기는 계속 빼놓고 얘기 했으니까, 결국 썩은 놈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에요. 귀신이나 썩었지... (웃음)
‘내가 푹 썩었다는 소리는 괜찮지만 남이 썩었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남이 거짓말했다 하지 말고 내가 거짓말했다고 말하자!’ 그래서 사회연대책임의식, 자기책임의식을 개발한 겁니다.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 나부터 달라지는 운동을 한 거죠.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도 만들었어요. ‘전쟁으로 물어준 막대한 배상금을 우리가 단결하여 회복하자!’ 또 하나는 ‘물질적인 손실을 정신적으로 회복하자!’는 거예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썩을 대로 썩어서 지옥문 앞까지 다다랐으니 지옥문에서 돌아서자는 거죠. 우리가 덴마크의 본을 받아 새마을 운동 때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잘살아보자!’는 구호를 내놓은 것처럼 그룬트비 목사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놓았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것은 신앙과 종교심을 가지고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은 성경에도 나온 말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해서 협동운동을 통해 나라가 일어나자는 뜻이에요. 그리고 ‘흙을 사랑하자’는 것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이 생명이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농업을 일으켜서 나라를 살리자는 뜻이었죠.
이 세 가지 모토를 가지고 밀고 나가면서 개척에 이바지한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1828~1894)라든지 교육에 이바지한 크리스티안 콜(Christen Mikkelsen Kold, 1816-1870) 같은 많은 동지들이 따르게 되었죠. 그러면서 덴마크가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과정을 자세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때 썼던 교재, 조직, 교육훈련... 이런 것을 100% 써먹은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 덴마크에서 공부할 때 농촌도 많이 방문하셨을 텐데, 어릴 적 우리 옛 농촌과 비교가 많이 됐겠어요?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사는 것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보다 더 못살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설득력이 있었던 거예요. 지금 현재 우리나라보다 더 못살았던 나라가 우리보다 천 배나 더 잘살고 있으니,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적용된 거죠.
◇ 유 박사의 진짜 박사 도전기
▶ 덴마크 부흥기의 의식개혁운동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해서 새마을운동을 만드셨는데 2년 동안 열심히 하시면서 제일 보람됐던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대통령과 독대(獨對)해서 얘기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저녁 내내 이야기했던 내용을 이튿날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나 방송에서 이야기하는데 제가 했던 말이 그대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 일이 가장 보람 있었죠. 물론 제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국정을 이끌고 나가는 국가 최고의 대통령이 내가 말한 그대로 이야기하니까요.
▶ 2년 후에 우리가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셨나요?
많이 보였죠. 한참 그 운동이 일어나는데 왜 떠났느냐고 하는데 유신과 동시에 저는 떠났어요. 그전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가끔 관련 장관들 서너 명이 와서 대통령께 보고를 하면 제가 배석을 했어요. 대통령이 맨 앞에 앉고, 장관들 앉고, 그 뒤에 비서관들 앉고, 맨 뒤에 제가 앉아서 슬라이드를 보는데 대통령이 한참 듣다가 ‘유 박사!’ 부르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유혁인 정무 제1수석 비서관이 ‘네’ 하면서 갔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당신 말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저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물어보시는 것을 조목조목 대답했더니, 그 다음부터 소문이 나서 모두들 나를 부를 때는 대통령 목소리를 흉내 내서 ‘유 박사’ 그랬어요. (웃음)
한번은 문교부 장관이었던 고(故) 민관식 장관이 문교부 발전대회를 한다고 전국에 있는 교육감, 대학교 총장들, 교장들 몇 천 명을 불러다 놓고 청와대 대통령이 와서 한 말씀 해달라고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대통령이 저를 대신 내보내라고 해서 제가 장관 옆에 앉아있다 장관으로부터 소개를 받는데,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분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새마을 운동을 지도하고 보좌하시는 류태영 박사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 그땐 박사가 아니셨잖아요. (웃음)
그래서 제가 마이크에 대고 ‘저는 박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를 박사라 부르지 말고 유 비서관이나 유태영 선생으로 불러주기를 바랍니다.’하고 10분 동안 기조연설을 했어요. 그랬더니 끝나고 교육감과 대학 총장들이 올라와서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악수를 하면서 ‘요즘에 박사도 아닌 것이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유 박사님은 박사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니 얼마나 겸손한 박사님입니까. 진짜 박사십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면 전부 저를 박사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때 가슴이 뜨끔하더라고요. 그때야 제가 청와대의 서슬 퍼런 권력 아래 있으니까 누가 아무 소리도 안 하지만, 언젠가는 청와대에서 나올 텐데 ‘저놈 가짜 박사다!’ 할 거 아녜요. 그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뜨끔하면서 빨리 박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난번에는 박사를 공부하러 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이 어떻게 살면 되겠는지 그런 실무적인 공부 하러 갔거든요. 이제는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학문의 체계를 잡는 박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스라엘 외무성에 편지를 했어요. 전에 외무부장관이 언제든지 공부하러 온다면 장학금을 준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정말 장학금 준다고 회답이 왔어요.
▶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분이 간다니까 더 좋아했겠네요. (웃음)
더 좋아했죠. ‘그런데 저는 월급이 적으니까 차비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다.’라고 편지를 했더니 차비도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청와대에 정식으로 보고를 했는데 지금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어디를 가느냐고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설득을 했죠. ‘새마을 운동을 이만큼 했으니 학문적인 체계와 이론적인 체계가 필요하다, 내가 가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오겠다.’
육영수 여사가 저를 따로 부르더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가느냐고, 대통령님이 유 비서관만 믿고 있는데, 그리고 이렇게 인기 있을 때 여기서 한자리를 해야지 그냥 나가면 되느냐고.’(웃음) 가서 공부 몇 년 하면 잊어버린다는 거였죠.
▶ 흔들리지 않으셨어요?
전혀. 유신 때 유신의원이라고 국회의원을 임명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이름도 육영수 여사가 넣었더군요. 그래서 저는 안 한다고 빼라고 했죠.
◇ 3개월 만에 히브리어를 끝내고 3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
▶ 혹시 이스라엘 가시기 전에 고향에 금의환향은 안 하셨어요?
고향에 가끔 방문하면 경찰서장부터 막 동네가 야단이 났어요. 머슴살이한 저희 아버님을 제일 상석에 앉히고 그런 때도 있었죠.
▶ 만류도 뿌리치고 결국 이스라엘로 가셨는데, 그게 언제인가요?
제대로 학문을 하러 간 때가 1973년 7월이었어요.
▶ 히브리어는 덴마크에서 하셨던 식으로 하신 건가요?
그렇죠. 이제는 학문을 해야 하니까 히브리어로 강의를 하는 대학에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외국인이라고 영어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3개월 만에 히브리어 다 끝내버리고 3개월 더해서 6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봤어요. 믿는 사람은 믿을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더라고요. 저는 결심을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나갔거든요.
히브리어는 덴마크어 보다 더 힘들었어요. 한국에 없는 발음이 많아요. 목에 걸린 생선가시 뱉어내는 목구멍소리가 많아서. (웃음) ‘엄마, 아빠, 까까, 쉬’ 하다가 말을 배우듯이 이스라엘 아이들도 엄마가 내는 소리를 흉내 내다가 이스라엘 언어를 배우잖아요. 흉내 내면 못 배우겠나 싶어서 3개월 만에 끝내버렸어요.
▶ 6개월 동안에 전문용어까지 배우고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없었어요. 사회과학대학에서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대학입학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생 둘과 인터뷰를 한 시간 했어요. 또 과장하고 주임 선생하고 번갈아 가면서 물어요. 어떻게 자랐는지, 생활환경은 어떠했는지, 왜 왔느냐, 뭐 배우러 왔느냐고 묻다가 나중에 사회학에 대해서 학자들 몇 사람 묻더라고요.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 머튼(Robert K. Morton, 1910~ ) 등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데 용케 제가 아는 사람만 묻더라고요. 대답했더니 한참 묻다가 과장이 옆에 사람보고 ‘당신은 한국에 가서 6개월 만에 한국말로 이 사람처럼 말 할 수 있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서로 안 된다며 자기들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들어갔죠. (웃음)
▶ 그래서 어느 대학을 가셨나요?
예루살렘히브리대학(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에서 농촌사회학을 전공했어요. 교수가 25년 만에 기록을 깼다고 그래요. 히브리어를 배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니까 별도의 문제고 보통 석사 하려면 인문사회과학은 3년 걸리고 자연과학은 2년 정도 걸려요. 박사 하려면 석사하고 나서 5년 있어야 하니 총 8년이 걸리죠. 그렇게라도 끝내면 빨리 끝낸 것인데 저는 4년 만에 석사, 박사를 수석으로 끝냈어요.
◇ 인스턴트 지식을 벗어난 유대인식 삶의 지혜
▶ 어제 제가 5년 반이라고 그랬는데... 죄송하게도 1년이나 늘려서 소개했네요.
이수하는 과목의 평균점수가 89점, 92점이었어요. 그곳은 공부 잘한다고 대통령상, 우등상, 총장상이 따로 없고 학위증서에 글자 한 자 써주는데 영어로 번역되면 ‘With distinction’이라고 우리말로 ‘빼어나게 구별된 성적으로’라는 단어 하나하나를 써줘요. 지도교수가 제게 금년에 이 글자를 써서 받은 사람은 저 하나라고 했으니까 제가 일등이죠.
덕분에 국립대학인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Ben-Gurion University of the Negev)에서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교수로 초빙해 주어 이스라엘 언어로 사회학을 2년 가르치다가 돌아왔어요.
▶ 이스라엘과 덴마크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덴마크는 150년 전에 있었던 것이고 이스라엘은 지금 말하면 30년 전에 일어난 얘기인데, 같은 점은 신앙을 가지고 정신적인 운동이 일어난 나라라는 점이에요. 다른 점은 주위의 환경과 역사적 배경이죠. 덴마크도 전쟁을 많이 하면서 망한 나라였고 이스라엘은 계속 전쟁 중에 있는 나라예요. 이스라엘은 사막이고 덴마크는 사막은 아니지만 황무지였죠. 이것을 개척하고 나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이스라엘은 키부츠(Kibbutz, 집단농장)와 모샤브(Moshav, 공동농장)의 집단농촌이고 덴마크는 일반 보통 가정의 개인농장이죠. 정신개혁운동도 덴마크에는 포크 하이스쿨(folk high school, 평민학교, 전형적인 성인 기숙학교 유형)이라고 하는 곳에서 정신교육운동을 했고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운동(Zionism,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서 정신교육운동으로 나가게 된 것이에요. 두 나라 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되 덴마크는 목사들이 주동이 되어서 농촌운동을 했고 이스라엘은 랍비들이 주동이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축이 된 것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보통 유대인 그러면 교육에 대해서 세계최고라고 하는데 직접 가서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유대 가정의 교육은 우리와 어떤 점이 다르죠?
교육적인 측면에서 다른 분명한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으로 알고 있고 이스라엘은 지혜를 가르치는 것을 교육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을 시켜요.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외우는 것을 많이 했죠. 60년 전에 외웠던 조선시대, 고려시대 역대 임금을 지금도 외우잖아요. 수학공식,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등 이런 공식이나 정의를 많이 외우는 것을 우리는 공부라고 하죠.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공부를 아예 안 시켜요.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보니까 산수교과서가 우리말로 I․Q 테스트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25+15, 125÷25’ 하는 문제들이 교과서에 나와요. 하지만 이스라엘 교과서에는 ‘두 자리 수를 두 번 더하는 문제를 10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세 자리 수를 두 자리 수로 나누는 문제를 열 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정수를 소수로 나무는 문제를 몇 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어렸을 때부터 문제를 자기가 만들게 해요. 삼각함수 같은 것도 몇 도와 몇 도를 더해서 어떻게 되는지 문제를 몇 개 만들어서 풀어보라는 식으로 전부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말하자면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 아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손가락으로 ‘갑자을축’ 하듯이 꼼지락 대기에 주역을 배웠나 했어요. 이스라엘도 음력을 쓰거든요. 그리고 소띠다 개띠다 하는 태어난 해에 따른 간지가 있어요. 우리와 12마리 짐승 중에 4마리만 다르죠. 우리는 없는 곰 띠, 전갈 띠 같은 게 있거든요. 그리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나이든 사람은 궁합을 봐요. 가만히 그 말을 들어봤더니 남녀가 4살 터울로 결혼하면 좋다는 그 소리더라고요. 무슨 띠와 무슨 띠가 만나면 좋다는 말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사주팔자를 배운 줄 알았어요. (웃음)
그래서 뭐하느냐고 하니까 일곱을 일곱 번 더하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구단 안 배웠느냐고 물어보니까 구구단이 뭐냐고 물어봐요. 안 배웠다고 하기에 구구단을 적어놓고 외우게 했더니, 다른 아이들은 안 하는데 자기만 한다며 싫다고 하더라고요. 거기는 한 달에 한번 의무적으로 학부모들이 와서 받는 교육이 있는데, 담임선생에게 이스라엘은 구구단도 가르치지 않느냐며 물었죠. 구구단이 뭐냐고 선생님도 묻기에 으쓱해져서 가르쳐줬더니 놀라워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거예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계산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계산기를 안 준다는 거예요. 애쓰며 계산하는 가운데 생각을 하고 창의력이 생기고 인간이 되어간다는 거죠. 외워서 쓰고 그러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더라고요.
미국에 파견을 나가보니 영국은 15단까지 외우고 인도는 19단까지 가르치던데 여하튼 이스라엘은 암기식으로 정보를 입력시키는 교육을 안 해요. 그러니까 집에서 숙제를 하다가도 엄마에게 질문하면 직접 대답하는 엄마가 하나도 없어요. 간접적으로 반대질문을 해서 깨닫게 해주지 절대 정답을 말해주지 않아요. 사지선다형문제는 있지도 않고 대학에서 시험을 보는데 시험문제가 타자로 10줄이에요. 예를 들고 ‘그래서 이 내용에서 볼 때 네가 생각하는 사상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문제만 파악하는데도 힘들어요. 어떨 때는 노트를 10장, 20장 줘가면서 두 시간, 세 시간도 시험을 봐요.
▶ 창의력을 보는 거네요.
창의력과 자기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점수를 따는 거죠. 정답이 없고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응용해서 각자가 풀어나가야 해요. 제가 예루살렘대학에서 첫 번 학기에 점수를 가장 많이 받았던 과목의 예를 들어 보면, 한번은 제 지도교수가 책을 하나 주면서 읽고 와서 다음 주에 발표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받아보니 스펠링은 알파벳인데 영어가 아니더라고요. 물어보니 스패니쉬(Spanish)래요. 그래서 스페인어는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더니 스패니쉬는 쉬우니까 그냥 읽어서 오라는 거예요. 저는 교수님이 미쳤나 했어요. 그러다 지혜를 얻은 것이 이곳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있는 유대민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보내는 학교니까 분명히 스페인에서 유학 온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스페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온 학생이 있어서 제목과 각 장(章, chapter)을 읽게 했더니, 아는 책이었고 두 장만 없더라고요. 그래서 스페인어로 된 두 장을 이스라엘말로 읽게 하고 한국말로 받아 적어서 그 다음 주에 발표를 멋지게 했죠. 그러니까 지도교수가 최고의 발표점수를 주면서 스페인어 못한다더니 어떻게 했느냐고 묻기에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모르는 학문의 책 재료를 주면 어떻게 소화하는가?’ 그것이 문제였고 그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시더라고요.
뭔가를 줬을 때 방법을 주면 안 돼요.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통해 스스로 방법을 체득하면 엄청남 자신감을 갖게 되고 해결하는 방향에 있어서 다른 일도 그렇게 한다는 거죠. 또 한 번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반 페이지 분량의 문제가 나왔어요. 선생님 강의를 모두 외웠다고 하더라도 뭘 써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그 시험에서 최고 점수인 97점을 받았어요.
첫마디에 그저께 읽은 이스라엘 신문의 기사를 썼는데, 이스라엘에서 애를 낳고 살던 사람이 미국에 가서 미국여자와 결혼해 10년 동안 오지도 않고 소식을 끊어버렸다가 10년 만에 왔는데 애들 데리고 사느라고 홀로 고생한 아이 엄마가 남편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경찰에 고발을 해서 재판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면서 징역판결이 나와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大書特筆)이 났죠. 이 얘기를 쓰고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사회제도와 법률공조 이런 것이 안 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선생님의 학설을 죽 풀었더니, 천편일률적인 다른 학생들의 답에 반해 저만 다르니까 이런 것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다른 애가 배우니까 피아노학원 간다고 하면 절대 안 보내지만 ‘엄마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찡해. 그래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싶어요.’ 하면 보내는 거예요. 누가 하니까 한다고 하는 것은 절대 안 보내죠. 그것이 교육 속에 스며들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오직 일렬로 줄을 세워서 일등 하고, 반장하고, 다 대통령 되기를 바라죠. 그럼 국민은 누가 하나요. (웃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하늘이 준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교육이에요.
◇ 성공으로 가는 길은 나만의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
▶ 유대인은 예술분야에서도 뛰어나고 돈 버는 데도 뛰어난데 그런 것들이 교육과 무관하지는 않겠어요.
노벨상을 받은 전체 수상자의 26%가 유대인이라고 해요. 그리고 노벨 의학상, 화학상 같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60%래요. 세계적으로 돈이 가장 많은 민족도 유대인이고 전쟁을 잘하는 것도 유대인이죠. 예술가, 음악가도 많고 학자도 많아요.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 샤갈, 다 유대인이고 세계적 음악콩쿠르도 다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서로 다른 달란트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아무리 돈을 잘 벌거나 바이올린을 잘해도 영어, 수학 못하면 바보취급을 받고 엄마들 입이 ‘욕 기관총’이 돼서 마구 난사 되잖아요. (웃음) 다른 달란트를 받았어도 기가 죽어 버리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공부 못한다고 절대 욕하는 엄마가 없어요. 그러니까 있는 재능들이 다 살아나죠.
▶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33살에 했어요. 제가 구두닦이하고 신문 배달하니까 다른 여자들이 저에게 관심을 둘 수도 없었죠. 그런데도 저는 속도 없이 다른 여자를 좋아해 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만 당했어요. 그러던 끝에 시골에서 교장선생님을 하시던 장인어른이 가난하지만 서울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저를 너무나 아껴주셨어요. 집에만 가면 밥을 해주시고 이야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장인어른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그 중에 셋째 딸과 마음이 통해서 결혼을 했죠. 처음에 결혼한다고 했더니 장모님이 절대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는데, 나중에 딸을 낳고 키워보니 그 마음을 알겠더군요. 바지는 떨어져가지고 엉덩이가 해어져서 살이 보일락 말락 하고 다니지, 제가 속도 없이 그러고 갔어요. 게다가 들어보니 나중에는 가정교사를 했지만 신문배달에 구두닦이나 하고 앉았지, 굶기를 밥 먹듯 하지, 아버님은 머슴 살았지, 누가 교장선생님 딸을 거기다 넣겠어요.
그래도 우리 둘은 결혼하기로 작정을 해서, 우선 친구들이 돈을 모아 달동네에 월세 방을 얻어줬어요. 장인어른도 장모님에게 꽉 잡혀서 결혼식에 오지도 못하고 집사람은 드레스도 못 입고 을지로입구에 있는 흥사단 강당에서 무료로 결혼식을 했어요. 한복에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구멍 뚫린 망사 화분 받침대를 뒤집어쓰고요. (웃음)
택시를 대기시켰다가 탔는데 그때 당시 신혼여행을 가면 속리산이나 온양온천을 가니까 택시기사는 횡재다 싶어서 기다렸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기본요금 올라가기 전에 내리자며 미도파 앞에서 내렸어요. (웃음) 3분 거리라 욕을 바가지로 할 텐데 신랑이 얼마나 가난해 보였으면 그냥 내려주더라고요. (웃음) 명동의 한일관에 가서 제 돈 내고 사먹는 음식으로는 제일 비싼 떡만둣국을 둘이서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안양에 갔어요. 6월이라 안양유원지에도 가고 여관에 가격을 물어보니 아까 먹은 떡만둣국 열 그릇 값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붕이 손에 닿을 듯한 여인숙에 가서 제일 싼 방을 달라고 했는데 바로 앞에 항아리로 만든 뒷간이 있고 얼마나 안 치웠는지 오물이 넘쳐서 구더기가 올라오다 떨어지고 있더라고요.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여인숙에서 잠자고 집에 돌아온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예요.
▶ 신부가 안 울었어요?
미리 각오를 했지요. 거지인데요 뭐...
◇ 두 여인에 의해 좌우되는 남자의 일생
▶ 덴마크 가기 전인데 덴마크는 같이 가셨어요?
남자는 일생을 통해서 여자를 둘 만나요. 하나는 어머니고 다른 하나는 부인이죠. 그 두 여인이 생애를 좌우합니다. 어렸을 땐 어머니의 교육, 성장한 뒤에는 부인이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협력을 통해서 사람을 바꿔 놓아요. 저는 우리 집사람이 저를 만들었다고 말해요. 저를 박사로 만든 것도 집사람이에요. 덴마크 공부하러 갈 때도 나만 초청장을 받았는데, 아기는 생기고 대책은 없고 당황하고 있는데 가라는 거예요. 아기를 업고 길가에서 떡 장사를 하더라도 살 테니 가라고. 얼마나 용기를 줬는데요.
▶ 고생이 엄청났겠어요.
엄청나게 했죠. 굶기를 밥 먹듯 하고.집에서는 시집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서 고생한다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어요. 지금도 저는 우리 집사람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웃음)
▶ 2년 만에 돌아오신 후에는 생활이 좀 나아졌나요?
조금 나아졌는데 그때 대학교수 월급이 워낙 박봉이다 보니 제가 가르쳤던 학생이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일 년이 되니까 저보다 월급이 더 많더라고요.
▶ 처가에서는 언제 인정을 받으셨어요?
청와대 들어가서요. (웃음) 장모님이 기뻐하면서 친척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난리가 났었죠.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가니까 정부에서 사람이 나오고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오고 막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쭐해가지고 대접을 받았지요.
▶ 이스라엘은 가족이 함께 가셨나요?
네, 큰애가 딸이고 밑으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만 5살, 3살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초등학교 상급반까지 유대인학교에 보냈어요.
▶ 거기서는 고생을 좀 덜 하셨나요?
한국보다는 덜 했지요. 그러나 저 한 사람만 주는 장학금으로 가족이 살려다 보니까 정부에서 방도 주고, 전기요금 같은 것도 다 내줬지만 아내가 부업으로 일도 하고 그랬어요.
▶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하셨나요?
학원이나 과외에 보낸 적은 없고 가정교사 한번을 둔 적이 없어요. 한번은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저에게 와서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봐요.’ 그래요. 자기 반의 친구가 내내 일등만 하다가 3등으로 떨어져서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고 퉁퉁 부어서 왔는데 자기는 4등 했다, 15등 했다, 7등 했다 하는데 한 번도 뭐라고 않는 것을 보니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는 그런데 별로 관심 없고 네가 친구를 잘 사귀는지, 인간성이 제대로 되는지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다. 친구들과 떡볶이 사먹으라고 돈을 자꾸 주는데 붕어빵도 사서 나눠 먹으며 친구도 만들고, 인간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나라를 생각하고, 신앙심이 좋고, 부모를 공경하고, 바른 마음먹고 그런 것들. 공부는 하는 데까지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대신 네 선택에 맞게 행동하며 살아라.’ 그랬어요.
◇ 고통과 역경의 불로 단련된 인생 칠십, 새로운 시작
▶ 잘 자랐나요?
입시 때 카이스트가 특차니까 시험을 보러 간대요. 저는 대학교수니까 대게 대학교수들은 아들이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서 건국대에 오라고 했더니 특차니까 한번 본다고 해서 보냈더니 합격을 한 거예요. 건국대 보내려고 반대했는데 본인이 가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니 그냥 보냈죠. 가서 수석으로 석사․박사 다하고 지금은 교수로 재직 중이에요. 딸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도 보냈는데 거기서 사귄 사람과 결혼했어요. 지금은 남편이 영국으로 발령받아 영국에서 살고 있어요.
▶ 지금은 형편이 많이 좋아지셨나요? (웃음)
그럼요. 아이들 집도 다 마련해주고 신혼여행에서는 집사람을 안양의 여인숙에서 재웠지만 지금은 세계 일주 7번에 63개국을 방문하고 외국에서도 6,7년을 살았죠. 부부간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협력을 하면 무에서 유로 다 이루어지더라고요.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주 신앙적이고 성실하셨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 많이 도와주시다 91세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 혹시 좌절해 본적도 있으세요?
없어요. 그 부분이 늘 하나님께 감사해요. 시골 대장간에 가면 낫이나 호미를 잘 만들기 위해 뜨거운 불에 많이 담금질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제 삶도 어려움과 고통 속에 많이 담금질 되면서 더 훌륭한 삶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합니다.
이라크에 가서 미국정부의 허락 없이 로비 활동했다고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미국에 수감되어있는 유명한 로비스트 박동선 씨와 선언한 것이 있어요. 70살이 되었을 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그 동안 연구한 성과와 그 동안에 보아오고 느낀 것들을 가지고, 그때부터 진짜 일을 할 ‘준비’가 끝난 것으로 하자고... 그래서 저는 지금이 시작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청소년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의 교육, 의식, 행동, 품행, 이런 것들이 나라의 운명과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어요. 청소년들을 제대로 교육, 훈련시키는 것과 새마을 운동을 했을 때처럼, 국민들의 의식개혁을 통해서 개별로, 집단별로, 국가별로 이 나라가 잘살게 하는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이 제 꿈이고,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