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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원고

나의 나 된 것은......
08/02/14 10:00 | 이명희 | 조회 3716 | 댓글 0
 

나의 나된것은.... - 송현영(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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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것은...
류태영 농촌청소년 미래재단 이사장

 

"각하,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부지런해야 먹고 삽니다. 우리 아버님은 어린 우리들에게가난한 자식은 부지런해야 먹고 산다하시며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순간 노트에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부지런해야 먹고 산다 말을 적으셨다. 나의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적었던 구절은 다음날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의 근간이 되었다. 내가 덴마크 유학을 마치고 처음 청와대에 초청 되어가 박정희 대통령께 우리농촌을 살리는 방법을 이야기 했을 때였다
.
가난한 자식은 부지런해야 먹고 산다
.”
아버지가 우리 형제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내가 자란 전북 임실의 청웅면에서 아버지는 부잣집의 고용살이를 살았다. 흔히 말하는 머슴이다. 120 사람 좋으신 할아버지가 친구의 부탁으로 보증을 것이 잘못되어 파산하고 몰락한 양반으로 고향을 떠나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훤하게 무렵이면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을 깨워서 함께 논밭으로 나가서 일을 하셨다.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는 것을 보며 불만 없이 우리도 그렇게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몸으로 보여주신 근면함
순한 성품의 아버지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시고 가난을 받아들이신 같았다. 남의 농사일이지만 정말 성실하게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셨다. 정직해라, 부지런해라, 꾀부리지 마라하신 말씀은 그대로 교훈이 되어 우리 가훈이근면, 정직, 성실 되었다. 남의 보리밭에서소에게 먹일 꼴을 베다가 실수로 보리를 베어오면 아버지는남의 재산을 베어왔다 무척 꾸중하셨다. 동네 사람들이용해 빠졌다라고, 지금 말로는 착하고 착하다는 말로 아버지를 말했다. 사람 좋고 정직하고 약속은 정확하게 지키는 고지식한 아버지는 신뢰를 몸에 받았다. 하지만 시절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주인집 아들과는 친구라서 함께 놀다가 한상에 밥을 먹어도 주인집 아들은 하얀 쌀밥을 먹었지만 머슴의 아들인 검은 보리밥도 겨우 얻어먹었다.

춘궁기에는 산으로 들로 나가 나물이나 도토리, 나무 속껍질로 죽을 먹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웃들에게 언제나 관대했다. 당장 내일 먹을 양식이 없어도 꾸러 오는 이웃을 그냥 돌려보내는 적이 없었고, 죽을 먹는 중에라도 배고픈 이웃을 불러다 먹일 정도로 남을 도와주는 일은 주저함이 없으셨다. 요즘 가치관으로 보면 무능한 가장일지도 모르지만 어머니는 이웃에게 나눠주는 아버지보다 좋아하셔서 불화는 없었다. 우리는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안 살림이 어렵다보니 위로 둘과 누나 둘은 초등학교조차 가보지 못했다
.

먹을 것도 없는 형편에 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꿈도 일이었다. 하지만 동네에서 방울쇠 같이 똘망똘망하다는 이야기를 듣던 나는 아버지께서 큰맘을 먹고 초등학교에 보내주셨다. 아홉 살에 들어간 초등학교는 정말 재미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새로 생긴 동네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는 재미는 말로 없을 정도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가난한 집의 아들인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겨지면서 날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다
.

하지만 보수적인 마을에 개혁적인 기독교가 들어오니 자연 동네에 소문이 났다. 제사도 지내지 않고 조상을 모시지 않는다고 알려지면서 아버지도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닐수록 아버지께서 무척 못마땅해 하시고 교회 시간에 일부러 시키는 일이 많았다. 어느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드시고 나와 동생을 불러다 앉혀놓고 회초리를 드시더니너희들 앞으로 교회를 나가면 책들을 모두 치워버리겠다. 어떻게 테냐? 교회를 다닐 거냐? 학교를 다닐 거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학교도 가고 교회도 다니겠다고 했는데 동생은 단호하게 학교에 안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교과서를 궤짝에 넣으시고 자물쇠로 잠궈 버리셨다
.

다음날 교과서 없이 학교에 가는 무척 창피했지만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보다는 아버지가 빨리 교회 다니시기를 기도했다. 모질지 못한 아버지를 알기에 다음날 어머니의 도움으로 궤짝의 교과서를 꺼내 학교에 갔다. 아버지도 모른 척하시고 그냥 넘어갔다. 우리형제들이 다시 교회를 나가는 것은 묵인하셨지만 당신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어머니께서 열심히 교회 섬기시면서 여름 성경학교 선생님들을 불러다 식사 대접을 때면 장에 나가셔서 제일 좋은 과일과 생선을 손수 사오셨다. 오랜 세월이 흐른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천국에 가셨다
.

삶의 은인, 아내

서울에서 고학할 정말 어려웠다. 구두닦이를 하면서 굶기도 많이 굶었다. 서울에서 고학하면서 어렵게 학비를 모아 대학에 들어갔다. 같은 사람이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다. 아내는 고향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셋째 딸이었다. 우연히 친구가 학교에 근무해 자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장인어른은 내가 가난한 집에서 자라 어렵게 고생하며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다는 점을 좋게 보시고 때마다 환대해주셨는데, 막상 당신의 귀한 딸이 나와 결혼하는 것은 특히 장모님께서 절대 반대했다. 사람은 좋지만 너무 가난한 시집을 가면 고생을 한다면서... 년을 기다리다가 언니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 불참하시겠다고 하셨던 장인 장모님은 결혼 이틀 전에 맘을 바꾸시고 겨우 예식에 참석 하셔서 축복하셨다.

아내는 부잣집에서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자라 힘들었겠지만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주었다. 나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달동네에 어렵게 월셋방을 구하고, 아내는 이미 있는 한복을 입고 남대문시장에서 망사를 사다가 면사포 비슷한 것을 만들어 쓰고 을지로 흥사단 강당에서 검소하게 식을 올렸다. 나는 난생 처음 양복을 입었다. 막상 식이 끝나고 나서보니 신혼여행을 가야하는데 돈도 없었다. 부조금으로 들어온 약간의 돈이 있었지만 도저히 없었다. 택시기사에게 사정을 하고 기본요금만큼만 택시를 타고 명동입구에서 내렸다. 한일관에서 떡만두국을 먹고 화장실에 들어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안양유원지로 향했다. 과외선생하면서 아이들과 소풍갔던 기억이 있어 유일하게 아는 유원지였다. 포도나무 잎이 파란 초여름 안양유원지는 한산하고 조용했다
.

아내와 나는 길가 포장마차 집에서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고 잠잘 곳을 찾아 가장 여관에 들어갔다. 아내에게는 길가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종업원에게 하루 방값을 물어보니 낮에 사먹은 만두국의 열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달라고 하는 아닌가? 아무리 신혼이지만 하룻밤 자는데 비싼 돈을 낭비할 없어 가장 허름한 여인숙을 찾아 걸었다. 아내는마음대로 하세요.”하며 조용히 따라왔다. 여인숙에서도 가장 방을 잡았더니, 재래식 화장실과 가까워 냄새도 냄새였지만 구더기가 방문 앞까지 기어와 떨어질 정도로 형편없는 방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조용히 웃기만 불평하지 않았다. 다음날 포장마차에서 다시 된장찌개로 아침을 하고 시내버스로 올라온 것이 우리부부의 신혼여행이었다
.

결혼하고 첫딸 소미가 백일이 지날 무렵 13 동안 기도했던 덴마크 유학길에 오를 있었다. 내가 하는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분야에서 공부할 있도록 돕겠다는 덴마크 정부의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뻤지만 아내와 딸을 두고 쉽게 결정을 내릴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나보다 기뻐하며길가에서 장사를 하든지 행상을 하든지 소미와 걱정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뜻을 이루세요!”하며 격려해주었다
.

유학을 다녀와도 가난한 살림살이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교수를 하고 돌아와서도 여전히 연립주택에서 월세를 살았다. 그러나 아내는 부잣집에서 자랐어도 함부로 낭비하는 법이 없이 근검절약해서 5 안에 집을 사도록 했다. 가정의 재정은 아내가 담당해야 재산이 느는 같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놀러와댁의 남편이 교수님이 맞느냐? 교수님 부인이라면서 지난 5 동안 한번 입던데, 진짜 교수가 맞느냐?’ 조심스럽게 물어볼 정도로 아내는 아끼고 아꼈다
.

지난한 세월을 말없이 인내한 아내는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 상이다. 평상시, 기나긴 세월, 위해 고생한 아내에게닥터메이커라는 별명을 부르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가끔 아내와 그때를 회상해본다. 지금에서야 아내는단단히 마음먹었지만 막상 어려울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 속으로 후회도 많이 했다 한다. 한날은 친정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쌀이 떨어진 쌀독을 열어보시고좋은 자리 놔두고 가난한 남편 만나 고생을 하려고 그랬냐?’ 하시며 한참 우시다가 생활비를 주고 가셨던 적도 있다고 한다
.

백일지난 애를 업고서 하루 종일 일하며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삼십여 일이지만 지금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난다. 사실 당시 아내에게는 서울대 출신에 정부고위부처에 다니던 처남의 친구가 구애했었는데 예수를 믿어 예수 믿는 나와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내였기에 아무것도 가진 없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주었다
.

나는 제자들에게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짝이므로 진심을 다해 섬기라고 말한다. 큰소리 내지 말고, 남자로서 권위나 명예는 바깥에서 세우고, 낮은 자세로 자존심 세우지 말고, 손해가 나더라도 아내에게 순종하라고... 칠순이 넘은 내가 확신하는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다. 정말 삶의 은인인 아내에게 다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보낸다.

 

태영 농촌 청소년 미래재단 이사장

1936
전북 임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유학, 건국대학교를 졸업 농촌 부흥의 꿈을 안고 덴마크 국왕의 초청으로 노르딕 농과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유학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초대 새마을 담당을 역임했으며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하고, 벤구리온 대학교 교수,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농촌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 한국 이스라엘 친선협회 부회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 되고 싶다><천재를 만드는 유태인의 가정 교육법><이스라엘 바로 알기><꿈과 믿음이 미래를 결정한다>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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