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 초창기 청와대에서 겪은 비화
필자: 류태영 72년 대통령비서실 초대 새마을 담당
전:건국대학교 부총장
현:(재)농촌.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
1, 머리에
본인은 1972년, 대통령비서실 초대 새마을 담당으로 일 하면서 초창기 새마을운동의 기본계획, 정책기획, 추진사업 등을 담당하여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써서 남기기로 한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가장 가까운 역사적 배경,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것을 필자가 경험하고 일에 참여 보고 느낀 대로 아직 공개 되지 않는 비화를 기술하기로 한다.
여기에 그 비화들을 기술 하게 된 것은 농촌을 잘 살게 한다는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가난한 국가를 부강한 국가로 발전시켜 국민들의 생활의 질을 향상 시킨 다는 뜻이 담겨저 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하며
결심과 노력을 하면 얻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저 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무엇보다 그 텍스트가 필요 했고 필자가 그 정신적 기초를 청와대와 국가 고위직들에게 제공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뒤 지속적인 국민운동의 지도자 교육 훈련을 통한 양성이 중요했고 이어서 제공 되는 각종 프로젝트들이 당시 내무부에 의하여 꾸준히 개발 보급 되어 전 공직자들이 하나가 되어 추진 함으로 성공을 걷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발상 동기와 사회문화적 환경
8.15 해방 이후의 우리 선배들, 특별히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부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를 고심한 끝에, 우선 공산업을 이르켜 경제발전의 체력을 든든히 이루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먼저 공산업 최우선 추진정책을 국가의 모든 시책을 중점적으로 하여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박 대통령 이전에는 중농업정책(重農業政策)으로 국가 경제 발전책을 추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럽이나 구미 선진 국가에서는 대부분 농산업을 발전시킨 뒤에 1차생산인 농산업을 기반으로 하여 공산업화가 이루어졌고 우리도 원칙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있었으나 세계의 곳곳에서 현대 경제학을 공부하고 온 여러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의 중론이 공산업화가 먼저 이루어지고 차후에 농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좀 더 빠른 속도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론을 얻어 중공업정책(重工業政策)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공산업이 먼저 발전해야 한다며 공업을 일으키려고 보니, 민족 자본이 형성된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또 지도자도 없고, 사람들의 의욕도 없어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은 제일 먼저 외자를 도입하고 외국기업체를 유치하여 저렴한 인건비로 우리나라에서 7년 내지 10년 수익을 올린 뒤에 그 기술을 우리에게 이전 해 달라는 조건을 붙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각 지방에 많은 산업 단지를 조성하고 보세가공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는 시장성이 없기 때문에 생산품들은 다시 국제시장에 내다파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런 식으로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사업을 추진하여 상당 한 효과를 얻어 전체 국민소득을 올리고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70년대 초에 이르러 농촌에 큰 사건 하나가 발생하였다. 50년 만에 한반도에 찾아 온 대한발 (大旱魃)이 일어난 것이다. 벼를 심어야 할 농번기에 넉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하천이 물 한 점 없이 말라 버렸으며 벼모를 심으면 빨갛게 타죽어 버리고 밭에 심어놓은 작물도 다 죽어버렸다. 그러니 농촌에는 농민들의 아우성 소리가 나며 난리가 났다.
공산업이야 외국기업이 자본과 원자재를 가져다 외국 기술로 만들어내면 우리에겐 인건비 떨어지고 가동 되지만 농업과 농촌의 사회상은 말도 못하게 낙후 되었던 것이다.
이때 농촌 문제를 깊이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해가 1971년으로 새마을 운동의 효시(嚆矢)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농촌이 부각 하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던 사람은 이것을 기억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문성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영일군이 아니라 포항시로 편입 되어 있다. 그곳 면장 김두락, 의용소방대장 이상면, 마을지도자 이석걸 씨 등이 일치 단합 마을 사람들을 설득 하여 “ 한발이 닥쳐서 냇물이 한 방울도 없어 농작물이 다 말라죽게 생겼다” 면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마을 앞에 물 한 방울도 없는 내에 가서 강을 팠고 그곳에 고인 물 을 아침 일찍 부터 물을 날라다가 고추밭에 뿌려 주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어 소득증대 사업을 증진 시켰고 이후 여력을 모아 마을 진입로 안길 넓히기, 초가지붕 개량, 담장 개량, 부엌개량, 화장실 개량, 공동빨래터 조성등 후에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 될 때 하던 사업을 미리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미친 듯이 열심히 추진했었다.
이 사실을 영일 군수로부터 보고 받은 도지사께서 대통령께 보고가 됐고 박대통령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말을 하면서 감동을 하였으며 1971년 9월 17일부터 2일간 경상북도에서 개최 된 전국 지방장관 회의 (경제부처 장관, 도지사, 광역시장, 군수, 구청장)를 마치고 참석한 고위공무원 수백 명을 대동해 문성동 마을을 직접 방문 한일이 있었다. 그 후 면장과 부락지도자 그리고 의용소방대장등이 모두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돌아 와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직접 지시를 내렸으며 농촌 발전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 하였고 전국의 도지사, 시장, 군수들이 대통령 유시를 받들어 농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심을 많이 했으며 각기 자기 방식대로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까운 일본에서는 60년대 중‧하반기부터 “아다라시 무라 쓰꾸리 운도우(新しぃ 村 づく り 運動)” 즉, ‘새 동네 가꾸기 운동’이란 것을 추진 한 사례를 참고하여 내무부에서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 이라고 해서 농촌 개발 사업을 활발히 추진했던 것이다.
그때 청와대에서 대통령께서 정무수석 “홍성철”(이후, 대통령 비서실장, 내무부 장관, 보사부 장관, 통일부 장관을 역임 한바 있음) 에게 농촌을 살릴 방법을 좀 연구 시행 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그 때가 1971년 2월경이었다.
3, 청와대에 새마을 담당 부서를 설치하다
정무수석 “홍성철” 前전장관이, “농촌에 가서 실정을 좀 봐야겠다.” 하고 당시 경기도 도청에 들려도지사(김태경)에게 “농촌 실정을 파악 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니 한군데추천 해 달라” 고 하여 소개 받은 대로 이천 군수를 방문하여 농민들이 활발하게 마을 발전운동을 하는 대월면 마을에 이르렀고 마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회관도 짓고, 협동조합도 만들고 개발위원회도 만들고 하면서 열심히 부락 발전을 위해 애 쓰는 현장 모습을 보면서 진짜 새마을 운동이 목표하는 활동상을 볼 수 있었다.
그 마을뿐 아니라 이천군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둘러보는데 가는 곳마다 농민들이 활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홍 비서관은 “이 동네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일어났느냐?”고 물었을 때
“건국대학교의 류태영 선생이 와서 일주일간 연속해서 매일 저녁 농촌부흥특강을 했다. 그 사람은 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공부하고 선진국의 성공 사례를 슬라이드로 보여 주면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하면 된다.” 며 용기를 주고 동기를 부여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감동을 받아 단결 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홍수석 비서관은 이 사람을 좀 모셔다가 자문을 받겠다고 하여 류태영을 청와대로 초청 하게 되었던 것이다.
류태영은 청와대에 초대 되어 수석비서관들과 담당관들 7-8명이 있는 자리에서 5시간동안 우리나라 농촌문제를 주요 주제 별로 문제점과 대책들을 설명 하면서 무엇보다 머저 필자가 왜 그런 관심을 가지고 덴마크에 유학을 갔는지부터 설명 하였었다. 본래 류태영은 소년시절부터 깊은 산골 아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갖은 고생을 다하며 고학으로 학업을 성취 했다. 새벽에는 신문배달, 낮에는 구두닦이 등 갖은 고난을 극복 하면서 야간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대학을 나왔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농촌의 어려움을 보고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농촌을 살려야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고 농촌을 위해 공부를 하려면 세계 선진 농업 복지 국가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구두닦이를 하면서도 그런 결심을 했었고 그 꿈을 항시 잊지 않고 우리나라 농촌을 복지사회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꺾어 본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진 복지농업국가인 덴마크에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 한지 13년 후에 덴마크 후레드릭 왕에게 장문의 논문과 함께 편지를 보내어 국왕이 감동을 받아 덴마크 정부 특별 장학금으로 초청을 받아 유학을 하게 된 것과 그곳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를 소상하게 이야기 했던 것이다.
덴마크는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전을 하고 국민 경제가 무너지고 국가가 도탄에 빠져있을 때, 훌륭한 지도자들이 일어나 국민정신 개혁운동을 펼쳐 일어난 나라였다. 130∼140여 년 전, 덴마크에서 어떻게 하면 농촌이 일어날 수 있는 가에 대한 국민 운동사를 배우고, 농촌운동사, 농민운동사, 농업협동 조합사 이런 것을 공부했고 이것이 우리나라 농촌 개발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필자는 좀 현장감이 있는 나라에 가서 공부를 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세계 각 국의 매스컴을 타며 알려졌는데 이스라엘 국민은 한 손에 총을 들고 국가 안보를 지키며 다른 한 손에 괭이를 들고 사막을 개척하면서 “키브츠”다 “모샤브”다 하면서 농촌부흥을 일으킨 나라로 알려졌다. 그곳에 가서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스라엘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 효력을 발휘하여. 코펜하겐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을 통하여 이스라엘 외무성의 특별 국비장학생으로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었고 외국인들만 초청 하여 연수교육을 시키는 “Afro-Asian Institute”에서 6개월간 정식으로, 3개월은 키브츠에 가서 이스라엘의 농촌운동에 대해서 공부를 한 후 귀국하여 건국대학교에서 학생들 정신교육을 책임지는 자리에서 있을 때 청와대에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필자를 맞이하는 사람이 “홍성철” 비서관, “정종택” 비서관, “한기욱” 비서관 “유혁인” 비서관과 한 두 사람 그렇게 여섯 사람인가가 나를 맞이했으며 나는 거침없이 평소에 끓어오르는 농촌에 대한 꿈과 비전에 대하여 설명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처음에 한 시간쯤 필자에게서 이야기를 들어 방향을 잡고 정책 입안에 참고 할 생각을 했었는데 이스라엘 이야기, 덴마크 이야기, 내가 과거 농촌에서 머슴 살던 이야기, 농촌실정 이야기를 소상하게 설명 하면서 “농촌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정부에서 뭣하고 있느냐 덴마크는 이러저러했다”는 등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니까 “홍성철” 수석이 내 말에 흡인력이 있어서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처음에 약 90분 얘기를 듣고는 잠깐 쉬는 동안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저녁 약속을 전부 취소하고, 설렁탕을 시켜 먹어가면서 밤11시30 분까지 질의문답이 계속 되었다.
당시 공직에 있던 분 들은 밤 늦게까지 일 하는 것이 보통 일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열심히 노력 한 것이다. 필자가 청와대에 들어간 시각이 5시 30분 이었으니까 얘기를 많이 나누었고 질문도 많았다. 참석자 전원이 필자가 말한 전부를 노트에 필기를 하면서 경청을 한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까, “생전 처음 들은 얘기”였다는 평가였다. 이제까지는 아무도 덴마크 농촌이 부흥한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한 사람도 없고, 우리나라 농촌의 구체적인 사례를 경험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가난한 농촌에서 머슴살이를 했으며 그때 경험한 이야기를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설명 하며 주장하고 질의 문담을 받으며 90분 얘기하고 15 분 쉬고, 90분 얘기하고 15분 쉬고 해서 밤 11시 30분에서야 끝이 난 것이다.
10시 30분쯤 홍 수석이 대통령께 중간보고를 한 후 돌아 와서 기분이 좋아서 느닷없이,
“류 선생님! 각하께서 결정을 했습니다.” 즉 새마을 담당과를 설치하라는 말씀이 계신 것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일부터 여기 와서 농촌운동 하시지요. 오늘 저녁 류 선생님이 얘기한 그대로 여기서 하십시오. 우리가 도와드릴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사무실에서 오늘 저녁 내내 한 얘기를 그대로 실천하라고, 청와대에서 다 밀어준다는 것이다. 그 때 필자는
“안 되는 데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면서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 보세요. 제가 축산대학 학생들을 정신교육 하는 총책임자인 관장이고, 강의도 있고 한데 오늘 저녁 10시 30분에 결정하고 내일 아침부터 출근할 수 있겠습니까?”
“학교에는 사표를 내면 될 것 아닙니까?”
그때 당시 박 대통령 권위가 하늘에 있을 때요, 학교선생이란 직업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겼는지
학교 일보다 더 중요한 국가의 중대사이기에 그렇게 부탁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는 곤란합니다. 어떻게 금방 사표를 냅니까?”
그렇게 말했더니, 그럼 그냥 가시라고 하며 없던 일로 얘기가 됐다. 그날 밤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이 넘었다.
아침에 8시쯤 학교에 출근했더니 학교가 야단이 났다. 경비실에서 얼른 총장실에 가보라는 것이다. 총장실에 갔더니 총장하고 이사장하고 아침 일찍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밤 12시 넘어서 중앙정보부에서 총장님 댁으로, 이사장님 댁으로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류태영 선생이 출근하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서 청와대로 보내달라” 고 했다는 것이다. 총장님이 “사무인계고 강의고 걱정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얼른 청와대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지금 내 차를 타고 얼른 들어가서 “우리 학교의 영광입니다.”라고 하면서 보내더라고 하라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니 필자가 앉을 자리도 사무실도 없었다. 미리 새마을 담당관실을 만들고 필자를 부른 게 아니라, 어제 저녁 5시간동안 이야기하는 동안 수석비서관이 대통령께 건의 해서 대통령이 결재를 내린 것이었다.
필자는 수석비서관 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의논을 했고 우선 방을 만들어야겠다, 몇 사람이 일을 하느냐? 본래 어떤 기관이고 어떤 부서가 새로 생기기 전에 미리 연구검토가 되어서 몇 명이 어떤일을 하고, 장소는 어디다 하고, 누가 결재를 하고, 예산을 얼마로 하고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것이 일반 적인 예이지만 어제 저녁에 필자하고 5시간 얘기하는 동안에 결심이 된 것이었다.
그 때 실무적인 일은 “정종택” 비서관(후에 내무장관, 농림부장관, 노동부장관, 정무장관등을 역임)과 함께 의논하는 가운데 줄거리를 잡아 수석비서관이 주도 한 회의에서 다음 몇 가지를 결정 했다. 필자도 참석 한 가운데 홍수석비서관이 주도 하여 새마을 담당실을 만드는 산파 회의를 한 것이다.
1, 사무실은 우선 정무비서실 건물 공실로 되어 있는 반 지하실 사무실을 사용토록 한다.
2, 전국 군수 중에서 엘리트 군수 한분을 파견 받는다.
3, 농협동조합 중앙회에서 전국적으로 농민들을 지도하는 지도과장을 파견 받는다.
4, 농촌진흥청에서 CD요원 출신 유능한 과장 한분을 파견 받는다.
5, 타자치는 여비서를 하나 배치한다.
6, 이후 필요한 인원은 관계부처에 의뢰하여 파견 받아 일 하기로 한다.
회의에서 필자는 말하기를 “농촌에 가면 군수가 왕입니다. 농민들은 장관이나 도지사는 알지도 못하고, 농민이 아는 큰 관리가 군수이며 농촌 행정을 지휘 감독하는 데 군수가 제일“ 이라고 했으며 전 국 군수 중에서 똑똑한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종택 비서관이 무릎을 딱 치면서 “우리 내무부에 고등고시 양과를 합격해 전남 장흥 군수를 하고 있는 엘리트가 있는데 그 사 람을 데려오겠다.”고 제안 하니 수석비서관이 동의를 했으며 또 필자가 말하기를,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에 가면 농촌지도과 라 고 있는데 지도과장이 전국을 다니면서 농촌을 지도하는 아주 뛰어난 실무자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였으며 그분이 “한호선”과장이었다.
그 다음 청와대에 본래 있던 직원 한 사람을 비서로 데려왔고. 또 당시 농촌진흥청에는 CD요원이 있었다. CD라는 것은 “Community Development"의 약자로 8.15 해방 직후 미군정시절부터 농촌 부흥을 위하여 부흥부(건설부 비슷한 거죠) 산하에 미국의 지역사회개발운동 요원이라 해서 서울농대출신들을 뽑아 교육시켜서 각 지방에 보내 농촌운동을 하게 한 사람들이었다. 이 ”CD출신 행정요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농촌진흥청에 의뢰를 해서 선발 된 사람이 ”서정선과장“ 이 합류를 했다.
필자가 청와대에 들어간 하룻만에 사무실 집기 전화기등 설비가 갖추어 지게 되었고 2일후 농협중앙회에서 한호선 과장(후에 농협중앙회회장, 국회의원을 역임)이 파견되어 왔고 3일후에는 전남 장흥에서 군수로 일 하는 송언종 군수(후에 광주시장, 체신부장관 역임)가 파견되어 부임 했으며 6일후에는 농촌진흥청 서정선과장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기록보존 홍보 담당으로 KBSTV 방송국에서 김흥수씨가 합류 했고 그 몇 일 후에 보고서 작성의 필생특기를 가진 서울시에서 온 김재철과 보사부에서 파견 되어 온 최종건 시가 추가 되어 청와대에 최초로 정무비서실안에 새마을 담당실이 본격적으로 업무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4, 청와대 전 비서관들에게 한 최초의 새마을 교육
필자가 정무수석에게 건의하기를 “대통령께서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농촌을 살려 보겠다고 애 쓰시는데 대통령의 측근 비서관과 행정관 들이 대통령의 의중과 농촌사정에 대하여 잘 이해를 못 한 것 같으니 이 사람들에게 교육시간을 만들어 이해토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홍수석은 즉시 대통령께 보고 한후 특명을 받아 온 것이바로 청와대 모든 비서관, 보좌관, 행정관, 경호실의 간부들 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대통령의 농촌에 대한 국정 방향을 이해하고 농촌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교육을 하라는 것이었다.
새마을 담당실에서 정무비서관들과 협의하여 교육계획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아 시행하기로 하였다. 여러 가지 순서 가운데 가장 핵심 순서로 외부 특별 강사를 모셔다가 특강을 하기로 하여 우리는 당대에 전국적으로 정신교육 강사로 유명 한 류달영 박사와 행정 개혁에 관한 강사로 유명한 한태연 박사를 특강 강사로 모시기로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최종 결재 과정에서 류태영을 주강사로 하고 외부 강사는 모시지 말라는 하명이었다.
1972년 3월 중순이었다. 청와대 경내 지하에 큰 벙커 강당이 있는데 400여명이 모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사람들이 가득 찼었고 비서실장님의 인사 말씀이 있은 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국정 홍보 영화등을 감상 하고 필자가 한국농촌의 문제점과 그 대책을 설명 하면서 농촌 새마을 운동에 관한 소신을 설파 하였다. 이때 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찍은 현장 사례 슬라이드를 보여 주며 생동감 있게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한을 품어 내는 열렬히 호소하는 말투로 한국농촌 발전에 대한 비전을 토로 한 것이었다. 이때 무엇보다 우리에게 모델이 된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덴마크와 이스라엘의 사례 였었다.
덴마크가 1860년대에 일어났던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전을 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 주고 옥토로 곡창지대인 독일 북부의 영토(슬레스빅 홀스타인지역)를 독일에 할애 해 주었으며 사회의 모든 기반이 무너지고 국민은행이 파산을 하였었다. 온 국민들은 실의에 빠졌고 희망과 미래는 아무에게서도 찾을 수없는 절망과 혼돈스런 데마크 사회를 세계적인 선진복지농업국가로 발전시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 하였다. 어떻게 보면 현재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열악한 사회를 오늘날의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 덴마크를 만드는 데는 그룬트비히, 달가스, 크리스텐 콜드 같은 지도자들이 나와서 국민들을 계몽하고 하나로 통합하는 국민적 캠페인,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 기적을 일구어 냈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그룬트비히는 “하나님을 사랑 하자, 이웃을 사랑 하자, 흙을 사랑 하자” 라는 구호를 걸어서 신앙심으로 우리가 거듭나자는 것과 협동을 해서 어려움을 극복 하자는 뜻이 담겼고 마지막 흙을 사랑 한다는 것은 농업을 일으키어 잘 살아 보자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텐 콜드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통한 인성 개조 운동을 전개하는데 무엇보다 잘 못 된것을 남에게 핑계 대는 사회풍조를 개혁하기 위하여 자기책임의식, 사회연대책임의식을 계발 했고 달가스는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지옥문에서 돌아서자“라는 구호를 국민들 가슴속에 깊이 사묻히게 하여 경제적 손실을 인간 내면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뜻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각각 구호에는 이토록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를 건설한 실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서 역설 한 것이었다.
청와대의 비서실장을 비롯한 모든 보좌관, 모든 비서관 그리고 경호실의 간부들, 부속실에 있는 보좌관들이 다 모인 가운데 두 시간 동안 열강을 한 것이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일일이 열거 하면서 선진 농업복지 국가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결 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책임이 바로 여기에 계신 여러분이라고 강 조 했었다. 하나의 예로 필자가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박하를 심으면 박하초 기름값이 국제시장에서 고가여서 고수익 사업으로 권장을 하여 많은 농민들이 문전옥답에 재배 하였었다. 그 다음 해에는 국제박하 기름 값이 떨어져서 그대로 폐기하여 내버린 일을 소개 했다. 그런데 그것을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농촌지도소 직원이 무식해서 그렇게 했나보다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농민들은 전부 대통령을 쳐다본다고 했으며 대통령을 모시는 보좌관들이 알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지도 몰랐다든지, 알고도 가만있다든지 하는 모든 처사를 사사건건 들어서 여러분 책임이라고 강조 했다.강연이 끝나자 당시 “김정렴” 비서실장이 나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둥글게 표시를 하면서 대 만족을 표시 했고 이날 교육이 대 성공이라고 했다. 교육이 끝나자 수석비서관 들이 필자를 부르더니 자기 방에 가서 차 한 잔 하자고 하여 이방 저방 많이 초청 되어 격려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기욱” 교문수석은 “내 일생 들어도, 미국 유학도 갔다 오고 해도 이렇게 잘 못 했다고 욕을 얻어먹으면서 강의를 듣기는 처음인 데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다” 고 했다.
여기저기서 칭찬을 받고 제 방에 들어오니까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비서실에서 오늘 저녁에 안 바쁘시면 본관에 올라와서 낮에 한 강의를 그대로 본관에서 해 달라는 것이었다. 영부인실 나은실 보좌관이 강의를 듣고 너무 감동적이라고 영부인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류태영 선생이 강연 한 대로 하면 우리나라 농촌이 반드시 성공 하겠다고 강조 했다는 것이다.
저녁 식사 후 “정종택” 비서관이 필자를 인솔하고 본관에 올라갔더니 육영수 여사가 인사를 하고 “가족들이 다 들어야 한다“고 하여 “박근혜” 양, “박근영”양이 나오고 조금 있다가 대통령께서 나오셨다. 그래서 대통령 일가족을 앞에 두고 육영수 여사께서 “낮에 청와대 직원교육 할 때 강의 한 그대로 여기서 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그때는 농촌 문제의 문제 점등을 지적 하면서 그 책임이 대통령 보좌관이나 비서관의 책임이라고 하지 않고 대통령 각하 책임이라고 강조 했다. 역시 비서관들에게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나라 농촌문제와 그 해법을 선진국의 사례에 비교 하면서 열강을 한 것이었다. 대통령께서도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대통령께서는 옆에 있는 비서관을 부르더니 자기대통령 옆에 의자를 갖다놓으라고 하여 대통령 바로 옆 의자에 앉자마자 대통령께서는 내 손을 딱 잡고는 잡은 채 질문이 많았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런 경우 덴마크는 어떻게 했는가, 이런 경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는가? 등 질문이 많았다.질의 문답을 통한 대화를 하는 중간에 서강대학교를 다니는 “박근혜” 양은 중간고사라 시험 준 비를 한다고 나가니까 “근영”양도 따라 나가고, 그래서 육영수 여사하고 대통령, 두 분과 함께 밤 11시까지 얘기를 나눈 것이다. 대통령께서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필자는 감동을 한 것이 최고 권력자이신 대통령께서 이렇게 열심히 고민을 하시니 농촌은 반드시 개발 되고 변화 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더욱 심혼을 다 바쳐 일 할 각호를 더욱 굳게 다짐 할 수 있었다.
5, 국무위원들의 교육과 양지회 회원들의 교육
필자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은 청와대에서 모든 비서관들에게 한 강연과 대통령 가족에게 한 강연, 그리고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의 강연, 그리고 전남 광주에서 개최된 대통령 주재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한 강연이었다. 이렇게 하여 전국 국민들의 새마을 교육 프로그램을 세우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주재 국무회의에서의 강연:
당시 전장관들,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 기타 장관에 준하는 처장들 고위공무원들이 한 달에 한번은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국무를 다루는 회의를 하였다. 1972년 4월 초에 있는 국무회의에서 특강을 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께서 들은 그 이야기를 국무위원들에게 하라는 특명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대통령주재 국무회의에서 특강을 한 역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께서 장관들이 모두 다 듣고 느끼고 새로운 각오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특강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냥 보통 박수가 아니라 인기 가수가 세종문화회관 같은데서 노래 부르고난 뒤 박수처럼 오래오래 받았다. 강연이 끝난 후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해방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해외에 다녀왔고 공무원들이 많이 해외 출장을 다녀왔지만 오늘 류태영 선생처럼 보고 느낀 보고를 받은 일이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마음에 한에 서린 우리농촌 발전에 대한 생각이 없거나 적었기 때문이다. 류 선생처럼 마음속에 무엇인가 이룩하겠다고 미쳐야 한다.
여러분도 농촌을 살려 보아야겠다고 미쳐야 한다. 어떤 이일에 미치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번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새마을 운동에 여러분이 다 미치기 바란다.“ 라고 하여 ”미처라!” “미쳐야 한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양지회에서의 특강: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부탁으로 양지회에서 또 같은 강의를 하였다. 양지회는 본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께서 창립(?) 한 사회 봉사단체로 장차관 사모님들과 국영기업체 사장 회장 사모님들로
구성 되어 그늘진 곳에의 지원 및 사회봉사 사업을 했었다. 그리하여 영부인이 참석 하며 독려 할 때는 많이 나오는데 400-500 명 정도가 모인다.
이날은 남산에 있는 어린이 회관 (이후 국립도서관으로도 사용됨) 대 강당에서였다. 물론 정종택 비서관이 안내하여 갔었고 참석한 모든 회원들에게 정비서관이 필자의 소개를 해 주었다.
개회를 하자 영부인의 인사 말씀이 있었고 정비서관이 간단한 말씀을 한 후 필자를 소개하고 필자의 강연이 있었다. 90분 동안 계속 된 강의 내용은 청와대 전 직원에게 한 것과 국무회의에서 한 것등 비슷하였다 단, 대상에 따라 청중에게 맞도록 재구성 한 것이지만 내용은 비슷한 것이었다.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의 특강
한 달 후인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전국지방장관회의가 대통령주재로 열렸었다. 광주시 체육관에서
전국의 시장군수, 도지사, 교육감등 고위 고위공직자들 2,000 여명이 모인 중요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을 준비 하기위하여 하루 전에 청와대 정무비서실에서는 모두 광주에 내려갔었으나 필자는 강의 준비를 위하여 청와대에 남아서 원고 저리를 했었고 류혁인 비서관(당시 정무 비서관으로 동아일보 주미 특파원을 지냈으며 이후에 정무수석비서관, 외국대사를 역임했다)이 감수를 보시느라고 함께 강의준비를 한 것이다. 밤늦게까지 같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광주에 빨리 가느라고 김포 비행장에서 경찰 비행기로 따로 광주에 간 것이다. 이때 내무부 지방국장인 고건국장도 동승하여 세사람인가가 타고 갔었다. 당시(1972년) 고 건 국장은 내무부에서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총 지휘 한 중책을 맡고 있었으며 이후 고건 국장은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내무부장관, 농립부장관, 서울시장, 국무총리등을 역임 하였다.
이때 대통령의 특명으로 새마을운동의 기조연설을 필자가 맡게 되었었다. 오전에는 대통령의 유시 말씀이 있었고 주무장관의 보고, 각 도지시의 보고, 등의 행사가 있었고 점심식사 후에 필자가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역시 전에 국무회의에서 했던 것 처럼 필자가 덴마크, 이스라엘 유럽 각지에서 찍은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하는 특강이었다. 그 큰 체육관에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면 특수 시설을 해야 했다. 스크린이 가로 20여 미터에 세로 15미터나 되는 대형 스크린이요 슬라이드 프로젝트도 물론 대형으로 특수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후에 대통령께서 귀경하여 청와대로 돌아 오게 되어 있는데 필자의 특강 사간에 꼽박 자리를 뜨지 않고 계셨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대통령께서 오후 자리를 비우면 대부분의 고위 공직자들이 자리를 비운다고 하시며 끝까지 자리에 앉아 들은 것이다. 사실 대통령께서는 몇차레 들은 같은 내용의 이야기인데도 그중요성을 강조 하기위하여 자리를 지키셨다고 한다.
이후 정 비서관이 많은 자리를 만들어 우리나라 오피니언 지도자들에게 비슷한 강의를 많이 했었다.
한번의 특강이 이토록 국가 지도자들에게 모두 한다는 것이 필자의 영광도 되지만 그토록 절실한
내용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중요한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새마을운동의 동기부여를 했다고 생각 한다.
6, 새마을 중앙 연수원의 설립
평소 부지런하고 윗분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정종택 비서관이 항상 필자를 대동하고 함께 이야기 하며 다녔다. 새마을 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려면 많은 용원들이 함께 뛰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 많은 지도자들을 양성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리하여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을 어떻게 어디서 해야
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새 농촌 건설을 주장 하며 군 사관학교의 틀을 활용하자고 만든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을 만나러 갔었다. 시간이 급하다 보니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도 천호동을 지나 남쪽으로 광주군 신장면으로 비 포장 도로를 따라 논두렁과 밭두렁 길을 지나 가나안 농군학교를 찾아 간 것이다.
학교에 들어서니까 질퍽질퍽한 산장 에서 부슬비가 오는데도 “김용기”장로가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를 가꾸고 있었다. 마침 학교는 연수생 들이 하나도 없었다. 교실이라고는 흙바닥에다 집을 지어놓고 간이책상과 걸상을 놓고 강의를 하는 그런 사정을 쭉 둘러보고 학교교장이신 김용기 장로님과의 대화를 나누었었다. 설립 정신, 운영실태, 그리고 그의 농촌개발 철학등을 설명 듣고 우리는 일어났었다. 오면서 정 비서관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나라의 중대한 일을 이끌고 나가는 요원 양성을 하는데 이 가나안 농군학교에는 맡길 수가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가나안농군학교는 몇 해 전에 ‘막사이사이상을 탔는데 이는 한 가족이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한 교육에 이바지한 공로를 높이 평가 하여 상을 받은 것이다. 즉, 가나안 농군학교에는 선생과 사무직원 모두가 가족이요. 가족 아닌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아들, 딸, 사위, 손자··· 그러니 한 가문에다가 국가의 중대사를 어떻게 맡기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참고로 활용을 하자“
그 다음엔 [독농가연수원(篤農家硏修院)]을 찾아 갔다. 경기도 고양시에 농업협동조합 직원을 양성하는 전문대학인 농업협동조합대학이 있고, 그 안에 부설로 독농가(독실한 농민)들을 모아 교육 연수시키는 곳이 있는데 거기 원장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있다고 거기를 가보자고 해서 갔다.
농협대학에 찾아가 보니 지금 독농가연수원장은 강의중이라고 하였다. 강의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까 카키색 작업복을 입고 농민들 앞에서 열심히 강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그분이 “김 준” 원장이었다. 우리는 예고도 없이 강의하는 도중에 가만히 들어가 맨 뒤에 앉아 한 시간 동안 꼬박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워낙 열강을 하고 참 가슴에 와 닿는 내용으로 감명을 받았다. 끝난 뒤에 인사를 하고는 “참 훌륭하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나라를 위해서 애써 달라.”고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청와대에 돌아 온 후 정비서관이 윗분에게 보고 한 후 그 분을 새마을 지도자양성의 교육을 맡길 연수원장으로 내정하고 여러 가지 서류를 갖추어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여 재가를 받은 것이다. 마침 청와대에는 “김 준” 원장의 동기동창이었던 “박진환” 농촌담당 특별보좌관이 대통령 앞에서 이 사람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를 하니 대통령께서 쉽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분을 모셔서 새마을운동의지도자 교육의 책임을 맡겨라.” 최종 결재를 내린 것이다.
그 다음 찾아 간곳은 연수원을 개원 할 수 있는 시설물을 구하러 다녔다. 당시 정종택 비서관이 담당 한 부처가 내무부, 보사부, 건설부 등이었기 때문에 맨 처음 찾아 간 곳은 내무부 연수원이었다. 우리가 가서 보니까 시설이 좋았다. 그시설을 청와대의 힘으로 차용 하려고 드니 내무부에서 야단이 났다. 이것 내놓으면 큰 일 난다는 것이었다. 또 보사부연수원에 갔었고 건설부 연수원에도 갔었다. 마찬가지로 야단났었다. 각부 장관들이 나서서 도저히 줄 수 없다고 하여 나중에는 정종택 비서관과 류태영만 다녀가게 되면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하여 정비서관은 할 수 없이 다른 시설을 찾아 보자고 하였다.
정 비서관이 내무부에 있을 때 JC운동(청소년운동체) 단체를 담당 한일을 기억 하면서 수원 서호 호숫가에 영농후계자를 위한 농촌청소년회관(농민회관)을 크게 짓다가 예산이 모자라 중단하고 있는 건물을 생각 하게 되어 가보자고 하여 갔었다. 그곳에 가보니까 건물 골격은 완성 되었는데
중단하고 대책을 찾고 있다고 했다. 주변 환경과 건물등 아주 적지라고 판단하여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다. 주야로 작업하면 한 달 이내에 완성을 할 수 있으니 이것을 완공하여 사용하기로 하고 대통령께서 즉각 결정을 내렸다. 그때 대통령 말씀 한마디면 뭐 24시간 주야간작업을 해서 기간 내에 완성을 했었고 드디어 새마을지도자 중앙 연수원이 개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 준 원장님이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교강사들을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새마을 정신을 부어 넣는 인간 용광로 로써의
기능을 100분 발휘하기 시작 한 것이다. 각 시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다가 거기서 교육을 시켰고 그 교관들이 시도 교육원에서 2차 전달 교육을 할 뿐 만 아니라 국회의원들, 국영기업체의 임원들 그리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새마을 교육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 했던 것이다.
새마을 교육은 크게 나누어 정신교육(精神敎育), 환경사업(環境事業), 그리고 소득사업(所得事業) 이 세 분야로 나누어 효과적으로 실시했다. 내무부 당국에서 구체적으로 사업 항목을 제시하여 실행 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7, 새마을 현장의 암행시찰
대통령의 특명으로 새마을 암행 시찰 반을 구성하여 전국적으로 각 시도에 1사람씩 파견하여 2박 3일간 새마을운동 현장의 반응과 문제점등을 파악 하기위한 시도가 있었다. 이때 민폐나 관폐를 끼치지 않도록 충분한 출장비를 주었었다. 때 마침 5,000원 권 지폐가 최초로 발행되어 서로 처음 본다고 할 때 5,000원권 지폐로 30만원인가 하는 당시 큰돈을 현찰로 주었다. 필자는 전라북도를 담당 하여 건국대학교에서 농촌조사차 나왔다고 하며 시골 마을을 방문 했었다.
필자가 맨 처음 간곳은 시외버스를 타고 전라북도 남원에 도착하여 운봉면 깊은 산골 마을을 가기로 작정하고 자전거 대여소에서 보증금을 맡기고 자전거를 한 대 빌려 타고 시골 길을 접어들어 가게 되었다. 가다가 생각하니 시골 사랑방에 들려 농민들과 대화를 하려든 참이라 담배를 몇 갑 사가기로 마음먹고 담배 가개에 들려 담배를 샀다. 그런데 필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담배 값을 몰라서 담배 가개 주인에게 묻고 담배 10갑을 샀었다. 그 때 내 논 돈이 5,000원권 신 지폐였다.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돌아가는데 싸이카를 타고 온 경찰이 나를 세우고 심문을 하였다. 신분증을 보이고 건국대학교에서 농촌조사를 하러 간다고 했다. 나중에 확인을 해 보니 담배 가개에서 수상한 사람이니 간첩이 아닌가 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담배를 사는 사람이 담배 값도 모르고, 담배를 산다는 것이 20갑을 사고, 돈도 시골에서는 신문에 난 것을 보고 아는 새 지폐를 내 놓고, 근처 지리도 몰라 시골 마을을 묻지, 생김새도 초라하게 생겼지, 의심 할 만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20여분 걸려서 깊은 마을에 들어섰고 시골 마을사람들이 모여 잡담도 하고 지내는 마실방 (사랑방)이 있는 집을 찾아 들어가 모인 농민들에게 “저는 건국대학교에 있는 사람인데 농촌여론 조사차 나왔다고 하면서 말을 시작 하였다. 사가지고 간 담배를 가방에서 5-6갑 꺼내 놓고
담배를 권하고 또 돈을 주면서 이웃에서 막걸리 술을 사오라고 하여 막걸리 대접을 하면서 농민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하면서 민정을 살필 수 있었다. 한 농부는 불만이 많았다. “그동안 우리 마을이 수백 년 간 조용히 잘 지냈는데 요즈음 느닫 없이 새마을 운동인가 헌 마을 운동인가 한답시고 잠도 못 자게하며 정말 귀찮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옆에 앉은 다른 농부가 단호히 말을 꺼냈다. “이 사람아! 농촌을 잘 살려 보겠다고 대통령님이 나서서 노력 한다는데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나” 하고 핀잔을 주며 “우리도 마음을 합쳐 좀 잘 살아보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깊은 산골 농민들이 예정에 없던 토론회를 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자연스런 사회자가 되어 자연스럽게 말을 유도 하고 설명을 하면서 우리 농촌도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 주고 나중에는 필자에게 수고 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인사를 극진히 했었다.
필자는 끝까지 건국대학교에서 일 하는 사람으로 만 알려 놓고 그곳을 떠났던 일 이 있었다.
가날 저녁 많은 정보를 얻고 농민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 할 수가 있었다.
그 다음날은 임실에서 떨어진 장수군에 들렸다. 장수군에 들려 농촌 새마을운동 조사를 나왔다고 하니 시범적으로 잘 되었다는 시범마을을 안내 해 주는 대로 가 보았다. 마을안 길이 환하게 되었고 마을 안 길 주변의 나뭇가지들로 만든 울타리들이 다 뜯기어내고 담장을 쌓았으며 담장에는 철로 대문을 만들어 설치했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꼬부랑 한 기둥이 버티고 있는 초가집도 있었고 어느 집은 대문 값만도 못하는 초라한 집도 있었다. 마을 안길을 지나가면 환하게 보기 좋은 모습을 만드는 전시 행정적인 사업을 펼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을 지도자가 제대로 된 마을에는 놀라운 발전 모델 도 많았다.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마을 환경개선사업을 성공리에 이룩하여 새로운 마을 환경을 이루었고 소득증대사업도 성공리에 추진하여 가가호호 새로운 소득 작물 또는 비닐하우스 농사로 조기 생산을 통한 소득을 올리는데도 많았다.
어느 시범 마을에 가보니 군청 공무원이 또는 면사무소 공무원이 파견 되어 이장님 집에서 또는 마을회관에서 보고서 쓰기에 밤을 새우고 집에도 가지 못하고 몇일씩 주야로 근 무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서 내라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방 공무원들이 본래 일은 못하면서 새마을 보고서 쓰느라고 정신이 없이 지내는 사례는 여러 곳에서 목격 되었다.
그 다음날에는 김제군 백산면 어느 마을에 들려 여론 조사를 하고 밤늦게 마을의 작은 여관에서 잠을 자게 되었었다. 한밤중, 새벽 1시가 넘었을 때 창밖이 휘황한 불빛이 비치고 사람들의 소리가 나고 야단들이었다. 밖을 나가 보니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사닥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 기와지붕에 페인트 칠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을 몰라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우수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묵고 있는 집 앞을 통과 하는 국도가 있는데 10여일 전부터 도청에서 그리고 군청에서 그 앞국도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길도 고치고 국도 주변 집 벽에 붙었던 공고문이나 광고지도 뜯어내고 청소를 몇 일 을 두고 독려하며 검사하여 깨끗이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국무총리이신 김종필 총리와 수행한 장관들 그리고 도지사 가 그길 앞을 통과하여 김제시에서 열리는 행사를 하기로 예정 되었었다. 그리하여 지방 공무원들이 나서서 매일 주민을 동원하여 도로를 수리하고 닦고 모래를 깔고 깨끗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마을들이 새로운 마을로 깨끗이 단장 된 모습을 보이려고 길에서 보이는 모든 집들의 지붕에 페인트 칠을 했었다. 시간도 모자라고 예산도 모자라고 하여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따라가면서 눈에 보이는 쪽만 색칠을 한 것이다. 자동차로 지나가면 모든 마을의 기와지붕 또는 슬레트 지붕이 파란색, 오렌지색, 연두색, 빨강색등 조화를 이루어 참으로 보기가 좋았었다. 정말 농촌이 환경개선 사업이 모범적으로 잘 되어 있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의 정보에 의하면 내일 그 행사에 참가 할 국무총리께서 시간 관계상 육로로 가지 않고 헬리콥터를 타고 가신다는 것이다. 헬리콥터로 그 도로를 따라 비행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도 도로쪽에서 보이는 지붕에는 모두 페이트가 칠 해 져 있고 도로 반대쪽엔 시꺼멓게 된 모습을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도지사의 특명으로 도청과 군청 직원들에게 특별 동원령을 내려 밤중에 횃불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도로 반대쪽의 지붕에 페인트칠을 밤새도록 한 것이다.
필자는 하룻 밤을 새어 암행 민정 시찰 보고서를 작성 제출 했고 따른 분들도 마찬가지로 했었다.
특히 필자가 낸 보고서는 정무수석께서 특별히 대통령에게 보고하셨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각 시도에 파견 되어 암행 실사와 민정을 살피고 난후 정무수석께서는 조합 보고서를 작성하여 대통령께 일일이 보고를 하였고 그 후 바로 청와대에서 개최한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훈시가 내렸었다. 다른 분들의 보고도 있었겠지만 필자가 한 보고 내용이 모두 반영된 말씀이 있었다.
1, 앞으로는 국무위원들이 새마을 현장 시찰을 갈 때 사전에 알리지 말고 갈 것. 사전에 장차관이 나간다면 현지 지방공무원들이 모두 다른 일 제처 놓고 연출하여 진짜 보고 싶은 것을 못 보고 꾸며진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2, 고위공직자들의 현장 시찰이 잦게 되면 하위공직자들이 그 준비에 다른 업무를 소홀히 하니
불가피 한 사안이 아니면 하지 말 것. 그리고 너무 많은 보고서 작성을 강요 하지 말 것.
3, 마을 안길을 개선 할 때 무리하게 담장을 쌓기 보다는 마을 환경에 따라서는 생나무 울타리를 하 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판단 된다 그리고 마을 환경과 특성에 따라 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할 것.
4, 새마을운동은 각기 자기 부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무엇을 지원 할지 현장 사정에 따라 알맞게 할 것
특히 마지막으로 지시 한 사항은 농촌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도 잘살기 운동을 펼치라는
지시가 떨어진 셈이다. 그리하여 상공부에서는 공장 새마을 운동과 직장새마을 운동이 전개 됐고, 문교부에서는 학교 새마을운동, 즉 학부모들을 통한 새마을 운동이 전개 되었으며 심지어 국방부에서는 군새마을운동, 내무부에서 도시민들의 새마을 운동 그리고 부녀 새마을 운동등이 싹을 틔우게 되는등 전국적인 붐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최고 통치권자의 관심과 열정은 국정을 운영 집행하는 데 엄청난 힘을 부어 넣는 것이 되었다.
8, 맺는말
여기에 담고 싶은 에피소드 들이 많이 있으나 지면 관계로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근면 자조 협동정신으로 잘 살아보자“ 라는 새마을 정신의 창출과정에서 필자와 대통령께서 밤늦도록 이야기 하면서 양면 괘지에 필기한 내용, 그리고 대통령께서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와 작곡을 하여 국민들에게 보급시킨 비화등이 있다.
언론의 협력을 구하기 위하여 신문사들의 편집국장 사회부장들을 특별 초청하여 새마을운동의 목적과 그 깊은 뜻을 설명 하고 협력 해 줄 것을 부탁한 이야기. TV방송과 라디오방송사 들의 관계 임원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부탁드린 일 등이 크게 효과를 얻어 언론사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크게 붐을 이르킨 것이었다.
몇년 후에는 대학교 교수들 즉 지성인들의 새마을 운동 참여를 이끌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대학교에 새마을운동 연구소를 설치 운영토록 하고 전국적인 연합회를 구성하여 자발적이며 조직적으,로 참여 하게 한 것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을 법을 제정하여 뒷밭임 하였고 희생봉사 한 사람들에게 국가적 서훈을 할 수 있도록
새마을훈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 시행 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살려 보자고 시작 했는데 직장 새마을운동, 공장 새마을운동, 학교 새마을운동, 부녀 새마을운동, 대학 새마을운동, 심지어 군 새마을 운동등으로 확산되 거국적인전 국민들의 새마을운동이 되어 전 국민적 잘 살아보자는 운동으로 매듭을 지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