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역경을 극복 하는 지도자
류 태영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
(I)
류 태 영 건국대교수 증언
(72년 대통령비서실 새마을담당)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가장 가까운 역사적 배경, 그
리고 어떻게 일어나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것을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8.15 해방 이후의 우리 선배들, 특별히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부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를 고심한 끝에, 먼저 산업화를 이루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공업정책 중 심으로 국가의 모든 정책을 세우고 추진하였습니다. 박 대통령 이전에는 중농업정책(重農業政策)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농업은 좀 제쳐놓기로 했습니다. 물론 유럽이나 구미의 선진국가에서는 농업이 발전한 뒤에 공업을 기반으로 해서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우리도 원칙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곳곳에서 현대 경제학을 공부하고 온 여러 학자들에게 자문한 결과 공업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국부(國富)를 이룰 수 있다고 결론을 얻었고 중공업정책(重工業政策)을 쓰게 된 것입니다.
공업이 먼저 발전해야 한다며 공업을 일으키려고 보니, 민족 자본이 형성된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또 지도자도 없고, 사람들의 의욕도 없어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은 제일 먼저 외자를 도입해서 외국기업체를 끌어들였 습니다.
싼인건비를 가지고 너희들 재미를 봐라, 너희가 우리나라에서 한 7년 내지 10년 벌어먹은 뒤에는 그 기술을 우리한테 다 넘겨줘라. 그 다음엔 우리가 이익을 보겠다. 그런 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공단을 세우고 싼 노동력을 제공해서 보세가공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시장성이 없기 때문에 만들어서 다시 국제시장에 내다파는 일을 오래 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이런 식으로 경제개발계획사업을 추진하다 60년대 말에 사건 하나가 생겼습니다. 바로 대한발(大旱魃)이 일어난 것이다. 60년만의 극심한 가뭄입니다. 모를 심어야 할 봄에, 넉 달 동안 비가 안 왔어요. 그래서 모든 내가 물 한 점 없이 말라버렸어요. 모를 심으면 빨갛게 타죽어 버리고 밭에 심어놓은 작물도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농촌이 난리가 나버린 거예요. 공업이야 외국사람이 자본하고 원자재를 가져다 외국사람 기술로 만들어내면 우리 인건비 떨어지고 돌아가지만 농업은 말도 못하게 형편없어 진 거죠.
그때 아하, 하고 농업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때가 71년으로 기억합니다. 새마을운동의 하나의 효시(嚆矢)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새마을운동을 하는 사람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당시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문성동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 다. 지금은 영일군이 아니라 포항시로 들어갔을 거예요. 그곳 마 을의 지도자가 동네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한발이 닥쳐서 내에 물이 한 방울도 없어 농작물이 다 말라죽게 생겼다”면서 동네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서 마을 앞 에 흐르는, 물 한 방울도 없는 내에 가서 강을 팠습니다. 제일 밑 까지 파내려 가면 물이 고일 것 아닙니까? 가령 폭이 한 3∼4m, 깊이가 2m, 길이는 50∼60m 파니까 물이 나와요.
아침 일찍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물을 날라다가 고추밭에 뿌려 주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말이에요. 다른 지역은 고추가 다 말라죽어 버렸는데 이 지역은 물을 길어 날라다가 농사를 지었으니 그나마 잘 자랐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고추 값이 10배, 15배로 껑충 뛰어올라 그 마을이 부자촌이 되어 버렸어요.
그것이 소문이 나서 대통령께 보고가 됐어요. 그때 대통령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말을 하면서 장관, 도지사, 군수 수백 명을 대동해 그 문성동 마을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푸른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바로 이거다’ 하며 무릎을 치게 된 것입니다.
대통령이 청와대 들어와서 수석비서관을 모아놓고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농촌을 좀 살려라.” 새마을운동이란 말은 아직 안 나왔습니다. 전국의 시장, 군수들이 대통령 유시를 받들어서 농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심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가까운 이웃 일본에서는 어떻게 했는가를 먼저 조사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60년대 중‧하반기부터 “아다라시 무라 스꾸리 운도우(新しぃ 村 づく り 運動)” 즉, ‘새 동네 가꾸기 운동’이란 것을 했어요. 우리 내무부에서는 그것을 본떠서 “새마을 가꾸기 사업” 이라고 해서 ‘운동’ 차원이 아닌 사업으로 시행할 계획을 세웠습 니다.
그때 청와대, 내부에서는 정무수석 “홍성철”장관 - 나중에 대통령 비서실장도 하고, 내무부 장관, 보사부 장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하다가 청와대 정무 수석으로 와 있었어요. 대통령이 “홍성철” 장관에게 농촌을 살릴 방법을 좀 연구하라고 특별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가 1971년이었습니다.
정무수석 “홍성철” 장관이, “농촌에 가서 실정을 좀 봐야겠다.” 하고 경기도 도지사한테 갔습니다. “농촌 한군데를 보여 달라. 실 정을 좀 보자.” 그러니까 도지사가 이천군을 소개해 이천군청으로 갔지요. 이천군수가, “우리 동네에 지도자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괜찮은 마을이 있습니다.” 하여 찾아간 곳이 이천군의 어떤 면이에요. 그곳에 갔더니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마을회관도 짓고, 협동조합도 만들고 개발위원회도 만들고 야단났단 말이에요.
그 마을뿐 아니라 이천군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둘러보는데 가는 곳마다 농민들이 활활 일어나고 있었고 홍 비서관은 “이 동네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일어났느냐?”고 물었대요.
그러자 마을 사람들 말이,
“건국대학교의 류태영 선생이 와서 농촌부흥회를 했다. 그 사람은 덴마크와 이스라엘에서 공부하고 선진국 사례를 슬라이드로 보여 주면서 설명했는데 다들 거기에 감동을 받았다.” 그랬대요. 저쪽 마을에도 그러고요. 그래서 “홍성철” 수석비서관이 이 사람을 좀 데려다가 물어봐야겠다고 해서 저한테 전화를 건 거예요.
저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고학을 했습니다. 주경야독이 죠. 서울에 와서 새벽에는 신문배달, 낮에는 구두닦이 등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야간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대학을 들어갔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농촌의 어려움을 보고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농촌을 살려야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촌을 위해 공부를 하려면 세계농업 선진국가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1954년에 “류달영”박사가 쓰신 {새 역사를 위하여} 라는 책을 보고 덴마크 농민운동사를 알게 됐어요. 그 책에는 가난했던 덴마크가 선진복지 농업국가가 된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할 수만 있으면 덴마크에 유학을 가고 싶었어요. 석사‧박사 이런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농민이 그렇게 잘 사는가의 그 과정을 배워다가 우리 농촌에 써 먹어야겠다는 그 생각, 꿈에 그리던 생각이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구두닦이를 하면서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13년 후에 덴마크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60년대였습니다. 덴마크 후레드릭 4세 왕에게 장문의 논문과 함께 편지를 써 보냈는데, 임금님이 감동을 받아 저에게 덴마크 정부 장학금을 주며 초청을 해온 것입니다. 왕복비행기표, 생활비, 용돈··· 그곳에 있는 동안 덴마크 외무성의 공무원이 받는 월급을 받으면서 덴마크 말을 배우고 공부를 했어요.
덴마크는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전을 하고 국민 경제가 무너지고 국가가 도탄에 빠져있을 때, 훌륭한 지도자들이 일어나 국민정신 개혁운동을 펼쳐 일어난 나라였습니다. 그때가 지금부터 130∼140여 년 전입니다. 덴마크에서 어떻게 하면 농촌이 일어날 수 있는 가에 대한 국민운동사를 배우고, 농촌운동사, 농민운동사, 농업협 동조합사 이런 것을 공부했습니다.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좀 현장감이 있는 나라에 가서 공부를 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1967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세계 각 국의 매스컴을 타며 알려졌어요. 이스라엘 국민은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괭이를 들고 사막을 개척하면서 “키브츠”다 “모샤브”다 하면서 농촌부흥을 일으킨 나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난 그곳에 가서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스라엘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어요. 얼마 후 코펜하겐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불러서 가보니 본국에서 지시가 왔다는 거예요. 바로 이스라엘 정부에서 저를 국비장학생으로 초청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이스라엘에 학문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농촌이 일어나는가? 이것에 대해 외국사람들만 불러다 교육을 시키는 과정이 있었어요, 「Afro-Asian institute」라고 하는데 영어로 강의를 해요. 여기서 6개월간 정식으로, 3개월은 키브츠에 가서 이스 라엘의 농촌운동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왔어요. 그때가 1970년이었습니다. 돌아와서 건국대학교 설립자가 나를 만나더니 아주 중책을 맡겼어요.
건국대학교는 그때 당시 축산대학이 유명했는데 입학생들한테 등록금, 수업료도 받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육을 시키는 데 그 정신교육 책임을 맡아라, 그래서 관장이 됐어요. 저는 학생들 정신교육과 농촌운동을 강의하면서 한편으로 농촌에 다니면서 농촌운동을 했어요.
또 KBS 라디오의 [농가방송]이라고 해서 제가 3년을 방송했어요.계속해서 매일, 그러니까 동네에서 라디로를 듣고 뜻 있는 사람이 요청해서 경기도 지방 일원의 동네에 가서 사흘씩 나흘씩 연속강의를 했어요. 제 강의를 듣고 농민들이 막 일어나서 단결이 된 일이 있지요. 그것을 수석께서 알게 되었단 말이에요.
어느 날 71년 3월초에 전화가 왔어요. “청와대라고 합니다.” 저 같이 소작농 아들에다 고학한 빈민 출신이니까 권력계통에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없죠. 그런데 청와대 최고 수석비서관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받으니까 참, 첫 마디를 그렇게 겸손하게 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내가 청와대 정무수석 아무개입니다. 고명하신 선생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바쁘시지 않으면 지금 들어오셔 서 저희들에게 농촌에 관해서 좋은 말씀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러더라고요. 그때가 1시쯤이었어요.
그때 당시 청와대 권력이 대단하던 시절이니까, 알겠습니다 하고 가야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권력주변은 잘 몰랐어요. 외국에서 온 지도 얼마 안되고··· 그래서,
“안 되는데요.”
그랬더니 깜짝 놀람ㄴ서, “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내가 2시에는 학생 대표를 만나기로 했고, 또 3시에는 학생 상담을 하기로 약속해 놨는데 어떻게 근무 중에 갈 수가 있나요?” 내가 이렇게 무식합니다. 국가의 중요한 일인데···
“그럼 언제 시간이 납니까?”
“퇴근하면 시간 나지요.”
“몇 시에 퇴근합니까?” 5시라고 옆에 사람이 얘기하는가 봐요.
“그럼 5시에 차를 보낼 테니 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5시에 청와대에서 세단차가 건국대학교에 와서 그것 타고 들어갔어요. 그때 카폰이라는 것을 처음 봤어요. 자동차 안에 다이얼을 돌리는 그런 전화가 있더라고요. 비서가 학교 캠퍼스를 나가는 동안 전화를 걸더니 “지금 학교 캠퍼스를 떠나는 중입니다” 중앙청 앞에서 또 전화를 걸더니 “비표는 어디서 어떻게 수속을 할까 요?” 다해 놨으니까 수속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거 같았습니다. 청와대 출입은 장관도 전부 비표를 달아야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냥 그것도 없이 쓱 들어갔어요.
그때 나늘 맞이하는 사람이 “홍성철” 비서관, “정종택” 비서관, “한기욱” 비서관··· (나중에 장관이 되었지만 그때는 비서관들이었죠.) “유혁인” 비서관과 한 두 사람 그렇게 여섯 사람인가가 나를 맞이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처음에 한 시간쯤 나한테 이야기 들을 생각을 했대요. 방향을 잡고 참고로 하려고요. 그런데 이스라엘 이야기, 덴마크 이야기, 내가 과거 농촌에서 머슴 살던 이야기, 농촌이야 기를 왔다 갔다 하면서 “농촌은 이래야 한다, 이래야 한다. 정부에서 뭣하고 있느냐 덴마크는 이러저러했다”는 등 거침없이 이야 기를 하니까 “홍성철” 수석이 내 말에 흡인력이 있어서 빨려 들 어갔다는 말이에요.
한 90분 얘기를 듣고는 잠깐 쉬는 동안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저녁 약속을 전부 취소하고, 설렁탕을 시켜 먹어가면서 밤11시30 분까지 있었어요. 제가 들어간 시각이 5시였으니까 얘기를 많이 했지요. 질문도 많구요. 그분들 모두가 내가 말한 전부를 노트에 필기를 해요. 나중에 들으니까, “생전 처음 들은 얘기”였다는 거 죠. 댄마크 농촌이 부흥한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한 사람도 없 고, 우리나라 농촌의 구체적인 사례를 경험한 사람도 없고, 나는 농촌에서 머슴살이를 했거든요. 그런 얘기를 죽 90분 얘기하고 15 분 쉬고, 90분 얘기하고 15분 쉬고 해서 11시 30분에서야 끝이 난 거예요.
그런데 10시 30분쯤 수석이 대통령께 가서 중간보고를 했어요.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돌아와서는 느닷없이,
“류 선생님! 각하께서 결정을 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일부터 여기 와서 농촌운동 하시지요. 오늘 저녁 류 선생님이 얘기한 그대로 여기서 하십시오. 우리가 도와드릴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 사무실에서 오늘 저녁 내내 한 얘기를 그대로 실천하라고, 거기 수석 비서관들이 다 밀어준다는 거예요. 제가 또 뭐라고 대 답해야겠어요? 영광입니다, 그래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안 되는 데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 보세요. 내가 축산대학 학생들을 정신교육 하는 총책임자인 관장이고, 강의도 있고 한데 오늘 저녁 10시 30분에 결정하고 내일 아침부터 출근할 수 있느냐?”
“학교에 사표를 내면 될 것 아닙니까?”
나는 몰랐지만 그때 당시 박 대통령 권위가 하늘에 있을 때요, 학교선생이란 직업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겼는지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그렇게는 곤란합니다. 어떻게 금방 사표를 냅니까?”
그렇게 말했더니, 그럼 그냥 가시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간절히 부탁을 해 놓고는 없던 일로 얘기가 됐어요. 청와대에서 차를 태 워줘서 집에 도착하니까 12시 30분이 넘었더군요.
아침에 8시쯤 학교에 출근했더니 학교가 야단이 났어요. 경비실에서 얼른 총장실에 가보라는 거요. 총장실에 갔더니 총장하고 이사장하고 아침 일찍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그런데, 어제 저녁에 청와대 갔었느냐, 오늘 오라 그랬는데 못 간다고 했냐고 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밤 12시에 중앙정 보부에서 총장님 댁으로, 이사장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거예 요.
내용인즉 내일 아침 “류태영” 선생이 출근하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서 청와대로 보내라 그랬대요. 총장님이 그러더라구요. 지금 얼른 들어가라고요. 사무인계고 강의고 걱정말고 지금 본인 차를 타고 얼른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 러면서 “우리 학교의 영광입니다.”하더라구요.
그래서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앉을 자리가 없어요. 미리 새마를 담당관실을 만들고 저를 부른 게 아니라, 어제 저녁 저하고 5시간동안 이야기하는 동안 수석비서관이 대통령께 건의 해서 대통령이 결재를 내린 거죠.
그래서 저는 수석비서관 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의논을 했어요. 어떻게 할까? 우선 방을 만들어야겠다, 몇 사람이 일을 하느냐? 본래 새마을운동 본부도 그렇고, 어떤 기관이고 어떤 부서가 새로 생기기 전에 미리 Study 가 돼서 몇 명이 일을 하고, 장소는 어디다 하고, 누가 결재를 하고, 예산을 얼마로 하고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나하고 5시간 얘기하는 동안에 결심이 된 거예요. ‘새마을 운동’이란 말은 안 나왔습니다. ‘농촌운동’이에요.
“정종택” 비서관이랑 함께 의논하는 가운데, 몇 사람이 함께 일을 해야 할 것 아니냐 하더라고요. 수석이랑 앉은자리에서 나도 의견을 내고, 그 사람들도 의견을 내고 합의가 되었습니다. 제가 말했 죠.
“농촌에 가면 군수가 왕입니다. 농민들은 도지사는 알지도 못하 고, 장관은 더군다나 거리가 멀고 군수가 제일 높아요. 그러니 전 국 군수 중에서 똑똑한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정종택 비서관이 무릎을 딱 치면서 “우리 내무부에 고등고시 양 과를 합격해 전남 장흥 군수를 하고 있는 엘리트가 있는데 그 사 람을 데려오겠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빨리 조치를 했는지 이틀 후에 올라 왔더라고요. 다 사무 인계 해보리고요. 그 사람이 “송언종” 군수예요. 내가 들어간 이틀 후에 올라왔지요.
또 제가 말하기를,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에 가면 농촌지도과 라 고 있는데 지도과장이 전국을 다니면서 농촌을 지도하는 아주 뛰 어난 실무자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을 데려오라는 거예요. 그 사람은 내가 온 그 이튿날 들어왔어요. 그분이 “한호선”과장입니 다. 그래서 세 사람이 됐어요.
그 다음 청와대에 본래 있던 직원 한 사람을 비서로 데려왔어요. 또 당시 농촌에는 CD운동요원이 있었습니다. CD라는 것은 “Community Development"라고 해방직후의 부흥부(건설부 비슷한 거죠) 산하에 미군정 때부터 미국이 지역사회개발운동요원이라 해서 서울농대출신들을 뽑아 교육시켜서 각 지방에 보내 농촌운 동을 하게 한 사람들이지요. 이 CD출신 행정요원이 있었으면 좋 겠다고 하니까 농촌진흥청에 의뢰를 해서 뽑힌 ”서정선“ 씨란 사 람이 제일 나중에 합류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방이 결정되었어요. 방은 여기 어떠냐고 그러더라고요. 보니까 정무비서실에 있는 반 지하실이었어요. 영화나 비 디오를 미리 보고 골라서 좋은 것은 대통령께 보고 드리는 일종 의 홍보실이에요. 20평 남짓한 그 방 밖에는 빈방이 없어요. 좋다고 해서 거기에 책상 놓고 뭐 놓고 다 했지요.
그렇게 해서 이제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런데 지침이나 계획서 가 없어요. 류 선생한테 물어 보라 이거예요. “류태영” 선생이 와 서 하룻밤에 5시간인가 몇 시간동안 얘기를 하고 그래서 결정이 났다는 사실을 늦게 온 사람들도 다 알아요. 그래서 전부 나만 쳐 다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덴 마크에서 농민운동 한 것, 이스라엘에서 시온주의 농촌운동을 한 것, 네덜란드, 일본, 우리나라를 비교하고 아는 것들을 종합해서, “이것은 운동차원에서 해야 한다, 운동이란 것은 먼저 농민들의 의식, 생각하는 의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덴마크가 그것을 통해서 일어났다”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교육운동을 제안한 거예요. 모든 농민들을 설득해서 머리를 깨치게 만들고 손놀림과 발놀림 이 달라지도록, 마음먹는 것이 달라지도록 해서 그 뒤에 거기다 씨를 뿌리고 기술이다 뭐다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이런 운동차원에서 해야 한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과거의 내무부에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했던 것을 새마을운동차원으로 바꾸었지요. 또 그러기 전에 국토 가꾸기 사업이라는 것도 있었어요. 허물어진 산을 잘 메워 가꾸는 사업이었죠. 이걸 새마을운동 초기에 추진했어요. 그러다 가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다 흡수시켜 버렸지요.
이제 전 국민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때 당시 전국에 자연 부락이 약 5만개가 있었어요. 행정부락이 3만5천 개, 그러면 행정부락의 지도자 하나씩만 있어도 3만5천명 이에요. 그럼 10분의 1로 10개 부락에 강사가 하나가 나간다하면 3천5백 명이에요. 3천5백 명의 교관요원을 어떻게 양성하는냐? 중 앙에다 중앙 새마을지도자 양성소를 만들자고 제가 제안한 겁니 다.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이 시·도에 가서 또 교육을 시켜요.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이 나가서 농촌운동을 하도록 하자 하는 의견을 냈
어요. 그리고 받아들여졌죠. 그래서 부지런한 “정종택”비서관하고 제가 함께 다녔어요.
지도자연수원을 만들려면 어디의 누구를 원장으로 할 것이냐, 하 는 문제에서 맨 처음에 거론된 곳이 ‘가나안농군학교’였죠.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가나안농군학교에 들어서니까 질퍽질퍽한 산장 에서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장로가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가꾸 고 있었습니다. 교실이라고 흙바닥에다 집을 지어놓고 간이책상 놓고 강의를 하는 그런 사정을 쭉 둘러보고 왔어요. 오면서 정 비 서관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것이 역사에 중요한 얘기입니다. “나라의 중대한 일을 이끌고 나가는 요원 양성을 하는데 이 가나 안 농군학교에는 맡길 수가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가나안농군학교는 몇 해 전에 ‘막사이사이상을 탔는데 이는 한 가족이 국가와 사회, 교육에 이바지한 공로 로 받은 것입니다. 즉, 가나안 농군학교에는 선생과 사무직원 모 두가 가족이에요. 가족 아닌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아들, 딸, 사위, 손자··· 그러니 한 가문에다가 국가를 어떻게 맡기겠느냐, 이것은 나중에 참고로 활용을 하자 그러더라고요.
그 다음 간 곳이 어디냐 하면 내무부, 보사부, 건설부 등을 담 당하는 비서관인 정 비서관이 담당하는 내무부 연수원이었어요. 가서 보니까 연수원이 시설이 좋잖아요. 그걸 쓰자고 하니까 내무 부에서 벌벌 떨어요. 이것 내놓으면 큰일난다는 거예요. 또 보사 부연수원에 갔어요. 거기도 벌벌 떨어요. 건설부 연수원에 갔어요. 거기도 벌벌 떨고···
그래서 그 다음엔 [독농가연수원(篤農家硏修院)]이라고 고양시에 농업협동조합대학이 있고, 그 안에 독농가(독실한 농민)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곳이 있는데 거기 원장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있다고 거기를 가보자고 해서 갔어요.
농협대학에 찾아가 보니 지금 강의중이라고 해요. 창문으로 들여 다보니까 카키색 작업복을 입고 농민들 모아놓고 강의하는 사람
이 있었어요. 바로 “김 준” 원장이에요.
뒤에 앉아서 한 시간 동안 강의를 들었어요. 인사도 안 하고요. 강의하는 도중에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워낙 열강을 하고 참 가 슴에 와 닿는 얘기만 하더라고요. 끝난 뒤에 인사를 하고는 “참 훌륭하시다,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애써 달라.”고 인사를 하고 돌 아왔지요.
이 사람을 원장을 해서 우리 농촌운동을 하자고 제가 기안을 올렸어요. 마침 “김 준” 원장의 동기동창이었던 “박진환” 농촌담 당 특별보좌관이, 대통령 앞에서 이 사람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를 하니 대통령께서 딱 결정을 내린 거예요.
“그 분을 모셔서 교육운동의 책임을 맡겨라.”
이제 장소를 정하는 일만 남았죠. 정 비서관하고 저하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죠. 정 비서관이 전에 내무부에 있을 때 JC운동을 했어요. JC운동이란 청소년운동이에요. 농촌청소년운동에도 관여 를 한거죠.
수원 서호 호수가에 영농후계자, 말하자면 농촌청소년회관(농민회관)을 크게 짓다가 말았어요. 예산이 없어서 말이죠. 그곳에 가보 니까 뼈대가 근사한데 지었다 말았더군요. 그래서 대통령께 보고 를 드렸어요. 지금 쓰고 있는 장소는 뺏기 힘들고 여기는 조금만 주야로 작업하면 한달 이내에 완성을 할 수 있으니 이것을 지어 서 사용합시다 하고. 대통령이 즉각 결정을 했어요.
그때 대통령 말 한마디면 뭐 24시간 노동을 해서라도 기간 내에 완성을 했어요. 그래서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세워졌습니다. 그러 고 나서 각 시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다가 거기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까 농민출신으로, 농촌을 지어 본 경 험을 가진 사람으로 청와대에 들어온 사람은 저 한사람뿐 전부 엘리트 출신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졸업한 사람들이죠. 엘리트들이 거기 와 있더라고요. 나같이 똥을 퍼내면서 농사를 짓는다든지, 쟁기질한다든지 지게질하면서 농촌 에 산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농촌을 몰라요.
제가 대통령께 보고를 올렸지요. 대통령 측근에 있는 사람부터 정신운동을 해야 된다, 농촌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 죠. 바로 대통령이 특명을 내렸어요. 정무수석비서관이 나를 부르 더니 이 청와대 내에 있는 모든 비서관을 교육시키라는 겁니다.
교육계획서를 올리라고 하여 우리가 의논을 했습니다. 청와대 내 방공호를 겸한 큰 지하 강당이 있어요. 거기에 전원 모아놓고 아침에 비서실장이 인사말을 하고 수석비서관이 문제의 말을 하 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화도 보여 준 다음 그때 당시 유 명한 강사로 알려진 “류달영” 박사, “한태연” 박사 등 몇 사람의 전문가가 와서 강연을 하는 내용의 교육계획을 세워서 올렸습니 다. 올렸더니 위에서 강사들 이름 위에 줄을 긋고 그 자리에 “류 태영” 이라고 써놓는 거예요.
수석비서관이 ‘당신’이 하라는 거예요. “류달영” 박사 “한태연” 박 사 안 불렀어요.
한 3월 15일 쯤 되었나, 제가 슬라이드를 준비해서 전 비서관과 경호실의 간부들, 부속실에 있는 보좌관들이 다 모인 가운데 두 시간 동안 강연을 했어요. 그것이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어요. 다 들 큰 감동을 받았다고 그래요.
제가 학교에 있다가 목을 내밀어서 그곳에 간 것도 아니고, 공 무원을 하거나 정치에 참여하거나 하는데 조그만 미련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말을 함부로 했어요. 농촌에 가면 이런, 이런 일 이 있는데 이것이 누구 책임이냐, 바로 여러분 책임이다라고.
한 예로 내가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박하를 심으면 박하유가
국제수지가 맞는다 해서는 모든 농민들이 박하를 심어 기름 을 짜서 한 초롱에 그때 돈 30만원, 지금 돈으로 하면 아마 300만 원이 넘을 거예요. 그렇게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문전옥답에다 박 하를 많이 심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해에는 국제박하 기름 값이 떨어져서 그대로 내버렸다고요. 그런 일이 몇 년 전에 있었어요.
그것을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농촌지도소 직원이 무식해서 그렇 게 했나보다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농민들은 전부 대통령을 쳐다 본다 이거요. 대통령을 모시는 보좌관들이 무식해서 이런 일이 일 어난 지도 몰랐다든지, 알고도 가만있다든지 이러나 저러나 무능 하다는 거요. 여러분 책임이라고요. 사사건건 들어서 여러분 책임 이라고 그랬어요.
끝나니까 그때 “김정렴” 비서실장이 나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둥 글게 표시를 해요. 강연이 성공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수석비서관 들이 나를 부르더니 자기 방에 가서 차 한 잔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때 “한기옥” 교문수석인가, 문교담당관이 “내 일생 들어도, 미국 유학도 갔다 오고 해도 욕을 들어먹으면서 강의를 듣기는 처음인 데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다” 고 하더군요.
여기저기서 칭찬을 받고 제 방에 들어오니까 전화벨이 울려요. 육영수 여사 비서실에서 오늘 저녁에 안 바쁘시면 올라오셔서 낮에 한 강의를 그대로 해 달라는 거예요. 아까 강의할 때 “나은실”보좌관이 있었어요.
“나은실” 보좌관 듣고는 육영수 여사한테 “류태영” 교수님이 이 런, 이런 얘기를 했는데 너무 감동적이라고, 정말 그렇게 하면 우 리나라가 살겠다고 보고를 하니까 육영수여사가 부른 거요.
그래서 저녁을 먹고 “정종택” 비서관이 나를 인솔하고 본관에 올라갔잖아요. 올라갔더니 육영수 여사가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 러더니 가족을 다 데려와요. “박근혜” 양, “박근영”양 나오니까 조금 있더 대통령께서 나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일가족을 앉혀 놓 고는, 육영수 여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낮에 한 그대로 여기서 하라고 해요. 또 그대로 했지요. 하면서 그때믄 비서관이 잘못이 라고 하지 않고 대통령 각하 책임입니다. 하고 말했죠. 엉뚱하지 요. 난 뭣도 모르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용감하다고 막 대들었다고요.
“···이것은 농림부장관이 잘못한 것이요. 농촌진흥청장이 잘못했 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을 쳐다봅니다. 이놈의 정부가 어떻게 돼서 박하를 심었는데 베어 내버리게 했느냐, 정부에서 돈을 들여 사줘야지 이것은 각하 잘못입니다.” 대통령 얼굴 이 긴장해서 실룩실룩 하더라고요. 그렇게 연속 두 시간을 얘기 했어요.
그러고 나서 옆에 있는 비서관을 부르더니 자기 옆에 의자를 갖다놓으라는 거예요. 대통령 옆에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는 내 손 을 딱 잡고는 안 놔줘요. 잡은 채 질문이 많아요. 이런 경우 어떻 게 해야 되느냐, 이런 경우 덴마크는 어떻게 했는가, 이런 경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느냐··· 저녁 먹고 6시경에 들어가서 밤11시 까지 있었어요.
중간에 서강대학교를 다니는 “박근혜” 양은 중간고사라 시험 준 비를 한다고 나가니까 “근영”양도 따라 나가고, 그래서 육영수 여 사하고 대통령, 두 분과 함께 11시까지 얘기했어요. 대통령이 감 동을 받았다고 그래요. 그때부터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거죠.
연수원을 짓고, 교육을 하고, 분임토의다 뭐다 이런 것은 덴마 크에서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것을 도입해서 “김 준” 원장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렇게 해서 밀고 나가는데 정신운동이라 는 것은 일시적인 겁니다. 사람들을 강의로 감동시키면 참 감동적 이다, 잘 들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버려요. 이것이 연속성을 가 지려면 물리적인 인센티브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시멘트를 준다 든지, 지붕을 개량한다든지, 길을 넓힌다든지 눈으로 보이는 실적 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이 정신교육(情神敎育)에다 환경사업(環境事業), 그리고 소득사업(所得事業) 이 세 가지예요. 정신교육, 환경개선교육, 소 득증대사업 이런 것을 조직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예산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종택” 비서관은 머리가 아주 좋았어요. 이 예산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각 부처에 교부세라는 것이 있지요. 그것을장관들한테 얼마씩 확보해 놨어요. 돈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약속만 받아놓은 거죠.
이 돈은 새마을운동을 위해서 쓴다, 대통령 지시가 있어서 쓴다고 모든 부처에 그 돈을 확보해 놓고는 대통령이 지방출장을 갔는데 어느 마을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면
“소원이 뭐냐?”고 묻고 가령, “간이상수도 만드는 것이 소원이다”고 하면 그럼 그것을 해 주겠다고 대통령이 약속을 합니다.
그러면 뒤에서 “정종택” 비서관이 확보된 돈에서 지불하라고 해 요. 돈을 직접 주는 것은 아니고 홀딩 해놓은 그 돈을 쓰라고, 그 런 식으로 새마을운동의 붐을 일으키고, 또 거기에서 애쓴 사람을 인정해 주는 훈장제도도 만들고, 악수도 해 주고, 또 지도자증만 주면 그냥 도지사와 누구도 수시로 만나고, 전화를 걸어도 못 만 나면 반드시 리콜을 하도록 만들면서 막 사기를 올려주고, 이렇게 해서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의 아주 시발점에 제가 관여했다는 말입니다.
‘새마을정신’을 만들려고 할 때 대통령이 불러서 밤늦게까지 의논 을 했습니다. 자연히 제가 지내 온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대통 령께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나도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나서 학교를 못 가서 군에 들어갔다.군에 들어가면 먹여주고 입혀주고 가르쳐주고···” 자기 가난했던 옛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메 모를 하시더라고요. 또,
“우리 아버지 머슴 살 때 아버지가 우리보고 ‘가난한 집의 자식은 부지런해야 먹고산다.’ 그 말을 너무 뼈아프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부지런하게 살았습니다. 4시 30분에 일어나서 교회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노력을 하고 그 다음에 내게 주어지 숙명이나 운명에 대해서 불평이나 불만을 가져본 일이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개척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두닦이하고 신문배달, 신문팔이하고 장사하고 방학 때는 아이스 케키 장사, 실 장사, 빨래비누 장사 이런 행상을 하면서 돈을 벌 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그 정신이 중요합니다. 첫째, 부지런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더욱 ‘근면(勤勉)’해야 한다는 거요. 류 선생도 근면 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남을 비판하거나 불평 하지 않았다는 거요. 부모님한테 뭐라고 불평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거죠.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의 문성동 마을도 스스로 노력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또, ‘자조(自助)’ 정신이 중요합니다. 뭐 안 된다고 정부에다 뭐 안해주는냐, 욕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 다음은 ‘협동(協洞)’입니다. 국제협력. 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백 사람 힘을 모으면 가능하고, 1000명이 할 수 없는 것을 1만 명이 힘을 모으면 가능하다는 거요. 안 그래 요? 만원 한 장 어디 가서 점심 먹으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일만 명이 모으면 그것이 1억이에요. 큰 사업자금이 돼요. 돈 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 가치도 그래요. 만원 어치 밖에 가치고 없는 사람이지만 1만 명을 모으면 1억 원의 가치가 생겨요.”
그래서 『근면· 자조· 협동』정신으로 우리 잘 살아보자, 저하고 밤늦게 까지 얘기한 이틀 후 양면갱지에다 친필로 써서 우리 비 서실에 넘겨주었어요.
그것을 지금 새마을역사관에 보존하고 있지요. 그렇게 해서 새마 을정신이 나오게 되고 운동이 나오게 됩니다.
그 후 1년 남짓 있다가 저는 이스라엘로 공부를 하러나가요. 공부하러 나가는 이유가 있어요. 한번은 청와대 본관에서 장관이 그 때 상공부장관인가 어떤 장관이 보고를 했어요.
비서들이나 대사들이 뒤에 있지요. 그런데 대통령이 제일 앞에 앉아있고 슬라이드로 한참보고를 하는데 대통령이 “류 박사! 류 박사!” 그러니까 “유혁인” 장관이 “예”하고 옆으로 가니까 “당신말 고” 그러면 그 사람말고는 유씨가 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예” 하니까 몇 가지를 물어보더라고요. 이런 경우에는 어떠냐, 저 런 경우엔 어떠냐 그래서 대답하고 넘어간 일이 있는데 그때 분 위기가 정무비서실에 딱 퍼져서 내가 가니까 사람들이 나를 부르 기를 류 박사! 그래요 나는 그때 박사학위가 없을 때예요. 그러니까 농담으로 대통령 목소리를 흉내내서 나를 부를 때는 “류 박 사!” 그러면 나도 농담으로 한 줄 아니까 “예”하고 그래요. 그런데 청와대 출입하는 장관, 차관, 국장들이 진짜 내가 박사인줄 알아 요.
맨 처음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문교부에서 그때 “민관식” 장관이 문교부장관을 할 때 교육계의 새마을전진대회를 하겠다고 청와대에 요청하니까, 그래도 내가 대학에서 왔으니까 나보고 대 신 나가라고 해서 제가 장관 옆자리에 앉았지요. 장관님이 인사말 하더니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요원의 불꽃처럼 일어나는 새마을운동에 대통령 각하를 보필하시는 류태영 박사가 와 계십니다. 류 박사님 말을 듣겠습니 다.” 박수가 짝, 나와요. 사람들이 수백 명이 모임 자리에서··· 제가 나가서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나는 박사가 아닙니다. 진짜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박 사라고 하지말교고, 류태영 선생 한다든지, 류 비서관 한다든지, 다 른 말로 류태영씨 한다든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50분정도 새마을운동에 관한 대통령의 뜻과 추진 방향을 이야기 한 일이 있어요.
끝나고 나니까 교육감, 대학총장 몇 사람이 단에 올라와서 악수하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아, 류 박사님처럼 겸손한 사람 처음 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박사도 아닌 것이 박사라고 하는데 유 박사님은 박사라고도 부르 지 말라고 하니 얼마나 겸손합니까?”하면서 더 박사라고 부르네. 지방에 출장을 가도, 청와도 내에서도 전부 박사예요. 창피해죽겠 네요. 내가 청와대 있으니까 괜찮지, 언제인가 청와대에서 나올 때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저놈 가짜박사라고 할 것 아니겠어 요?
“내가 대학교에 몸을 담고 있으니까 박사를 해야겠다. 하려면 나 이 먹기 전에 해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어서 청와대에 물어보지 도 않고 이스라엘에 편지를 냈어요. 지난번에 6개월 공부하고 올 때 외무부에서 어느 때든지 당신이 공부하러 오면 장학금 준다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진짜 공부하고 싶다. 그때는 농촌이 잘 사는 법만 배웠고, 이제는 학술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그랬더니 거기서 장학금 초청장이 왔어요.
대통령 비서실장한테 보고를 드렸지요. 그게 7개월 지났을 때요. 그랬더니 지금 이렇게 해 놓고 어딜 나가느냐는 거예요. 비서실장이랑 정무수석이랑 얘기하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라해서 1년 조 금 더 채우고 제가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지요. 청와대에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는데 내무부에서 온 “송언종” 군수는 거기 있다가 새마을 담당국장으로 나갔어요. 그 러다가 내무부차관을 지내고 전라남도 도지사, 광주광역시장, 체 신부장관 지내고 지금 변호사를 하고 있어요. “한호선”씨는 오래 있었어요. 13년이란 세월을 끝까지 지켰어요. 노 대통령 때까지 있었으니까요. 13년 동안 있으면서 점점 승진을 해서 농협중앙회 의 상무이사로 나갔다가 나중에 중앙회 회장을 두 번이나 하고, 국회의원도 했습니다. 대출 중요한 얘기를 하자면 이쯤 됩니다.
끝
류태영 건국대학교 명예 교수의 본 증언은 2001년 9월 27일 서 울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교보빌딩 1812호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실에서 녹음하였습니다.
녹음자는 본 기념사업회 연구위원 김찬수입니다.
첨부1. 류태영 교수 이력서 1부.
2001. 9. 27
증언녹취기록자 : 연구위원 교육학박사 김찬수
履 歷 書
(Ⅰ) 身上明細
姓 名 : 류 태 영 (柳 泰 永)
生年月日 : 1936年 5月 14日生
原 籍 : 全北 任實郡 靑雄面 九臯里 413
本 籍 : 서울 松波區 新川洞 20-4, 진주Apt. 16동 102호
住 所 : 京畿道 龍仁市 駒城邑 寶亭里 1162 東亞쏠레씨티아파 트 128-502
電 話 : 自宅; 031) 265-1349 住民登錄番號 : 360514-*******
事 務 室 : 02)721-3285 電子郵便住所: taeyeungyou@hanmail.net
移動電話 : 011) 268 - 6309
(Ⅱ) 學歷 및 硏究經歷
1957. 4. 1 ∼ 1964. 2.27 建國大學校 卒(法律學 專攻)
1964. 4. 1 ∼ 1965.12.16 韓國聖書大學校 卒(基督敎 敎育學 專攻)
1968. 7. 7 ∼ 1969.11.29 덴마크外務省招請으로
NordicAgricultural College에서 硏究(農村社會開發 專攻) 1968. 夏季 ∼ 1969.夏季 덴마크 外務省 計劃으로 歐洲諸國文化察 比較硏究 (2個月間)
1969.11.29 ∼ 1970. 4.1 이스라엘 外務省 招請으로 Afro-Asian Institute 硏究院에서 硏究 (農村開發 및 農村指導 專攻)
1973. 7. 1 ∼ 1978. 7.18 이스라엘 外務省 獎學金으로 Hebrew Uiversity of Jerusalam 大學院에서 硏究. 社會學 碩士 및 博士 取得
(Ⅲ) 主要經歷
1961. 3. 1 ∼ 1961.12.20 靑雄中學校 敎師(柳興春校長 委囑)
1966. 2. 1 ∼ 1968. 6.31 龍人福音農民學校 敎長
(康泰國 理事長 發令)
1967. 5. 1 ∼ 1969.4.30 京畿道技術敎育聯合會 理事會 副會長(被選)
1970. 4. 5 ∼ 1971. 1.20 韓國聖書大學校 專任講師 및
企劃管理室長(康泰國敎長 發令)
1970. 9. 1 ∼ 1972. 3.20 大韓基督敎神學校 講師(崔潤權敎長 委囑)
1971. 2. 1 ∼ 1972. 3.20 韓國聖書大學校 講師(康泰國校長 委囑)
1971. 2. 1 ∼ 1973. 3.21 建國大學校 生活館(誠館) 館長
(劉錫昶 理事長 發令)
1972. 3.15 ∼ 1973. 3.15 大統領 秘書室 初代새마을 擔當
(大統領秘書室長 委囑)
1972. 5. 1 ∼ 1973. 3.31 大韓敎育聯合會 새마을敎育 硏究委員
(敎聯會長 委囑)
1977. 8. 1 ∼ 1978.8.31 이스라엘 Ben-Gurion University 招聘敎授
(Ben.大 Moshe Rosen 總長 發令)(農村社會學.韓國社會學 講義)
1978. 9. 1 ∼ 2001. 8.31. 建國大學校 助敎授, 副敎授, 敎授
1978. 9. 1 ∼ 1980. 8.31 建國大學校 附設 새마을硏究所 副所長
(郭鍾元總長 委囑)
1980. 9. 1 ∼ 1989. 2.27 建國大學校 附設 새마을硏究所 所長
(趙一文, 權寧贊總長 委囑)
1979. 1. 1 ∼ 1989.12.31 興士團 公議會 副會長(被選)
1979. 4. 1 ∼ 1988. 8.22 建國大學校 涉外委員-덴마크·이스라엘
擔當 (郭鍾元 趙一文 權寧贊總長 委囑)
1979. 9. 5 ∼ 1980. 9. 4 서울特別市 敎育硏究院 諮問委員
(서울特別市 敎育監 委囑)
1979. 9.12 ∼ 1993. 3. 1 韓國 中東學會 常任理事(被選)
1980. 4. 1 ∼ 1983. 3.31 社團法人 韓國 덴마크 親善協會運營事
(被選)
1980. 7. 8 ∼ 1981. 5.30 새마을硏究協議會 委員
(文敎部 李奎浩長官 委囑)
1980.10. 1 ∼ 現在 韓國 이스라엘 親善協會 總務理事, 副會長 (被選)
1980.11. 1 ∼ 1980.12.31 三級國家公務員 特別試驗委員
(總務處長官 委囑)
1980.12. 1 ∼ 1981. 2. 5 國務總理室 政策評價敎授
(南悳祐 國務總理 委囑)
1981. 2. 6 ∼ 1983. 2. 1 國務總理室 政策諮問委員
(南悳祐·金相鋏 國務總理 委囑)
1981. 2.16 ∼1993. 2. 1 內務部 政策諮問委員(徐廷和·盧泰遇,··,
高健·安應模長官 委囑)
1981. 6.18 ∼ 1982.12.30 새마을分科委員會 委員
(文敎部 李奎浩長官 委囑)
1982. 4.30 ∼ 1986. 4.30 社團法人 새마을文庫 本部理事(被選)
1982.12.15 ∼ 現在 農協中央會 運營諮問委員(尹勤煥,
韓灝鮮,元喆喜,鄭大根會長委囑)
1983. 3. 1 ∼ 1991. 2.28 學校法人 泰成學園(泰成高等學校 運營)
理事(被選)
1983. 4. 1 ∼ 現在 韓國 덴마크協會 副會長(被選)
1983.10.22 ∼ 1987.10.21 社團法人 全國大學 새마을硏究所
聯合會 副會長(被選)
1983.10.22 ∼ 2001. 8.31 社團法人 全國大學 새마을硏究會 理事
1983.11.30 ∼ 1984.11.30 韓國 덴마크農業振興協議會 諮問委員
(全羅北道 趙撤權知事 委囑)
1985. 1.29 ∼ 1987. 2. 1民防衛隊 敎育訓練敎官
(서울特別市 廉普鉉市長 委囑)
1986. 3. 1 ∼ 1988. 8.30 建國大學校 建大新聞社 主幹 兼 編輯人
(劉承潤 理事長 發令)
1987. 2.27 ∼ 1988. 2.27 87年度 1種圖書(高等學校用) 編纂審議會委 (文敎部長官委囑)
1987. 9. 1 ∼ 1989. 2.28 建國大學校 農業敎育學科長 同大學院
學科長(權寧贊 總長 委囑)
1989. 3.17 ∼ 1995. 2.28 常虛文化財團 附設 韓民族文化硏究院
院長(劉承潤 理事長 發令)
1990. 6. 9 ∼ 2000. 8.31 興士團 附設 島山아카데미硏究院 院長
(興士團 理事長 委囑)
1988. 8.22 ∼ 1989. 2.28 建國大學校 學生處長(劉承潤 理事長 發令)
1991. 3. 1 ∼ 1993. 2.28 建國大學校 農科大學長
(劉承潤 理事長 發令)
1991. 3. 1 ∼ 1993. 2.28 韓國地域社會開發學會 理事
1991. 9. 7 ∼ 1998. 8.31 새마을運動中央協議會 諮問委員
(金壽鶴會場委囑)
1991.10.25 ∼ 現在 財團法人 大山農村文化財團 副理事長,
理事長(被選)
1993. 2.23 ∼ 1994. 8.31 建國大學校 副總長(劉承潤 理事長 發令)
1993. 3. 1 ∼ 1994. 8.31 建國大學校 博物館長(劉承潤 理事長 發令)
1993. 3. 8 ∼ 2001. 7. 5 財團法人 常虛文化財團 常任理事(被選)
1993.12. 1 ∼ 2000.12. 5 財團法人東亞世亞硏究院 理事(被選)
1994. 3. 1 ∼ 1994. 8.31 建國大學校 附設 亞太硏究所 所長
(鄭鎬權總長 委囑)
1994. 5. 1 ∼ 1995. 5. 1 韓國農村社會學會長(被選)
1996. 7.23 ∼ 2000. 7.23 亞細亞農村社會學會初代會長(被選)
1997. 1.10 ∼ 1999. 5.31 敎保生命(株)非常任 顧問
(李中孝社長 推戴)
1997. 4. 2 ∼ 現在 中國延邊科學技術大學 兼職敎授
(金鎭慶總長 委囑)
1997. 4.17 ∼ 1999. 4.17 社團法人 延邊羅津科學技術大學後援會 理事(被選)
1999. 4.17 ∼ 現 在 社團法人 東北亞敎育文化協力財團
理事 (被選)
1998. 2.7 ∼ 2000. 8. 7 農林部農消政元老會議 元老委員
(金成勳長官委囑)
1998. 7. 5 ∼ 2000. 8. 7 農林部南北農業協力推進協議會
委員 (金成勳長官委囑)
1998. 7. 5 ∼ 2000. 8. 7 科學技術部 南北科學技術協力推進
協議會委員(科技部長官委囑)
1999.12.18 ~ 現 在 社團法人東北亞科學技術協力財團 理事 (被選)
2000. 3. 5 ∼ 2001. 8. 7 새천년民主黨 21世紀國政諮問委員會
顧問(金大中總裁委囑)
2000. 5.20 ∼ 2001. 6.30 敎保生命(株) 非常任顧問
(李萬洙社長推戴)
2001. 7. 1 ∼ 現 在 敎保生命(株) 相談役(權敬鉉社長推戴)
2000. 9. 1 ∼ 2001. 9.20 社團法人 島山아카데미 硏究院
副理事長 兼 院長
2001. 8.18 ∼ 2003. 8.17 새만금環境對策委員會 委員
(李漢東 國務總理 委囑)
2001. 8.31 ∼ 現 在 建國大學校 名譽敎授
(金敬姬 理事長推戴)
2002. 7.01 ∼ 現 在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諮問委員
(金大中大統領 委囑)
2002. 9.17 ∼ 現 在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常任分科委員
(金大中大統領 委囑)
2002. 10.9 ∼ 現 在 島山아카데미 硏究員 副理事長
(選出 )
(Ⅳ) 賞勳 및 表彰
1972. 5. 8 功勞勳章 (敎育 및 育成有功) 大韓民國 在鄕軍人會 總裁 授與
1980.12.18 感謝狀(海外弘報有功) 文化公報部 李光杓長官 授與
1980.12.10 産業勳章 銅塔章(增産政策有功) 全斗煥大統領 親授
1985.10.25 새마을 勳章 努力章(새마을 運動有功) 全斗煥大統領
授與
1994.12.17 感謝狀(文化交流有功) 이스라엘首相 Yitzhak Rabin
授與
1995. 6.20 表彰狀(社會奉仕 및 韓美親善 交流有功)
美國 L.A 市長 Richard J. Riordan 授與
1995. 6.26 表彰狀(社會奉仕有功) 캘리포니아 州 上院議員
Richard G. Polanco 授與
1995. 6.20 表彰狀(社會奉仕有功) 美國 上院議員 Barbara Boxer
授與
2001. 8.23 表彰狀(二世敎育有功) 國務總理 李漢東 授與
(Ⅴ) 著書出版 實績
① 福音과 救國과 宗敎敎育의 展開 (1964.12. 韓國聖書神學
② 外國의 새마을運動 (1972.12. 金門社)
③ 이스라엘 民族精神의 뿌리 (1981.9. 아가페出版社)
④ Cooperative Farming in Israel(1979.8. 建大 出版部)
⑤ 잘 사는 작은 나라 (5人共著, 1984.5. 興士團出版部)
⑥ The Patterns of Rural Development in Korea(1986.6.Land Reform Training Institute Taoyuan, Taiwan, China)
⑦ 이스라엘 國民精神과 敎育 (1986.9. 이스라엘 文化院 出版部)
⑧ Jewish Immigration and Agricultural Settlements in Israel (1987.6. 이스라엘 文化院 出版部)
⑨ 이스라엘 그 試鍊과 挑戰 (1991. 三省出版社)
⑩ 天才는 없다 (1995. 成賢出版社)
⑪ 이스라엘 農村社會構造와 韓國農村社會 (1996. 養英閣)
⑫ 이스라엘民族의智慧 (엮음, 1999.韓國이스라엘親善協會刊)
⑬ 언제나 나는 꿈꾸는 靑年이고 싶다 (2000,12.1 國民日報 出版部)
⑭ 天才를 만드는 유대인의 家政敎育法 (2001.4.1 國民日報 出版部)
⑮ 지혜의 샘, 탈무드에서 배우는 子女敎育法 (2002.10.國民日報
出版部 )
(Ⅵ) 敎材執筆
① 文敎部 發行 中學校用 敎科書 (1972) 민주생활2에 3개의 글을 씀.
1.새마을 精神과 새마을 運動
2.덴마크의 復興과 國民運動
3.祖國을 다시 찾은 이스라엘의 精神力
② 새마을運動 敎育用 敎材 執筆 (內務部, 文敎部, 外務部用 1972,1973)
(Ⅶ) 映畵製作
① 다음 映畵의 企劃, 監督, 錄音, 解說을 單獨 專擔하였음.
1.沙漠을 開拓한 이스라엘(1976)
16미리, 總天然色, 옵틱싸운드, 55分品
2.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1976)
16미리, 總天然色, 옵틱싸운드, 53分品
② 새마을運動 敎材用 슬라이드 責任製作
1.文敎部 複寫 製作 普及
外國의 새마을運動 (덴마크, 스위스, 네델란드, 오스트리아)
시나리오, 肉聲錄音테이프, 113枚의 슬라이드
2. 文化公報部 複寫 製作 普及
外國의 새마을運動 (이스라엘 편)
시나리오, 肉聲錄音테이프, 83枚의 슬라이드. 끝
1973년 3월초, * 최종수정일 : <script>getDateFormat('20060810190101' , 'xxxx.x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