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山村)의 위대한 스승
류태영 박사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사회학박사
건국대학교 농대학장, 부총장 역임
도산아카데미 연구원장(現)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現)
건국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교 교수(現)
위대한 스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세계적으로 명성이 나 있고 교과서에 소개된 페스탈로치 또는 죤 듀이 같은 분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별로 그런 이름도 빛도 없이 그 위대한 스승 못지 않은 훌륭한 교육자가 세상에 알려질 기회를 갖지 못하고 묻혀있는 경우가 더 많이 있다.
필자의 국민학교 5학년과 6학년을 담임했던 신현구(申鉉九) 선생님이 바로 그런 위대한 스승가운데 한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금년 76세의 고령임에도 60대로 보일만큼 건강미가 넘치는, 키는 언제 어디서 뵈어도 작은 편인, 항상 소신에 차 있는, 선생으로 보이는, 교직자의 냄새가 물씬 난 분이다. 바로 지난달 고향에 가서 선생님을 뵈옵고 인사드리며 식사대접을 해드리고 50년전 선생님에게서 배운 10여명의 제자들과 함께 환담을 나눈 일이 있었다. 지난 늦은 봄에 선생님께서는 50년간의 교직생활에서 퇴직하셔서 전주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계신다고 했다. 65세에 도교육청 장학관, 중고교 교장 등을 역임한 후, 교육공직에서 퇴직하시고 다시 전북 장수에 있는 백화여고 교장으로 76세까지 근무하셨으며 일생을 교직에 몸담아온 선생님의 생활에는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신 보람으로 비록 재산은 모으지 못했지만 가슴이 든든하리라 믿는다.
선생님은 교직생활의 첫발을 들여놓은 곳이 바로 필자가 어린시절을 지낸 전북 임실군 청웅면이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깊고 깊은 산촌의 마을에 오신 것이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계곡 같은 동네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희망없는 아이들을 깨우치며 마음과 정열을 다하여 가르치셨다.
그때 우리 농촌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는 상태였다. 36년간 일본의 통치아래서 갖은 방법과 수단으로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농민들은 끼니를 잇지 못하고 배고품에 허덕이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때가 바로 필자는 국민학교 5학년(1947)시절이었다. 소년기로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래에 대한 꿈과 바라는 것이 많던 시기였다.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당시의 농촌실정을 요즈음 젊은 이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인줄로 안다.
필자가 겪은 당시 농촌실정과 농민의 생활은 말 그대로 비참했었다. 송피(松皮)라고 하는 소나무껍질(겉껍질을 베겨내고 속껍질)을 벌목장에서 베껴다가 큰 솥에 삶아서 검붉은 색의 독소를 욹여낸 다음 그 질긴 섬유질을 확독 또는 돌 절구통에 넣어 짖이깬 후 그것으로 개떡이나 수제비죽을 쑤어 먹었다. 도토리를 따다가 연명하고 칙뿌리도 캐먹었다. 한달내내 곡기(穀氣)가 조금도 입속에 들어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감자나 고구마가 가장 접하기 쉬운 식량이 되었다.
어머니가 길쌈하여 만든 옷감으로 옷을 해 입었고 옷은 1달에 1번 세탁을 했다.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산과 들을 쏘다니면서 살았기에 발바닥이 강아지 발바닥처럼 두터워서 웬만한 가시는 찌르지도 않았다. 대부분 초가집이나 오두막집에서 살았고 뗏집(잔디 뗏장으로 벽돌을 대신하여 지은 집)에서 사는 이도 있었다.
식구들이 많은 가정에서는 아들이나 딸을 부자집(밥먹고 산다는 집)에 무급식모 또는 무급노동자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 필자는 山村에 오신 훌륭한 스승 신현구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을 담임하시던 2년간 선생님은 민족의 수난기에 서서 우리 어린 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고 미래를 위해 많은 기(氣)를 불어 넣어 주셨다.
필자는 그때 노트 살 돈이 없어서 길가에 붙은 대자보를 뜯어다가 노트로 만들어 과제물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때 선생님은 박봉을 털어서 노트 몇권을 사서 주시면서 격려해 주셨다.
서울에서 고학(苦學)하던 시절, 길가에서 구두닦이도 하고 신문배달도 하며 각종 행상(아이스크림 장수, 빨래비누 장수 등)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며 공부할 때도 선생님은 항상 잊지 않고 격려의 편지와 가끔 금일봉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 뒤 틈나는대로 찾아뵈옵고 희망과 새로운 의지를 이르키는 말씀을 들었고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 수많은 학생들을 그토록 항상 관리하셨었다. 그러므로 항상 따뜻한 스승님의 그 사랑은 잊을 수가 없었다. 한번 맺은 사제지간의 사랑이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조금도 변함없이 따스하기만 하다.
이제 내나이 63이 넘어서고 있으면서도 그때 그선생님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그 선생님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증명하고도 남으리라.
1940년대의 우리농촌, 말그대로 원시적 생활수준을 탈피하지 못한 그시절 산촌 소년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교육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국가발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왜냐하면 그때 산촌의 청소년들이 성장하여 국가경제발전에 있어서 주역을 맡은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농촌 구석구석에서 지금도 이름도 빛도 없이 묵묵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스승들에 의하여 농촌의 청소년들이 건실하게 교육받고 자라는 동안, 그들의 가슴속에 푸픈꿈이 자라는 동안, 한국의 미래농촌발전은 크게 기대해 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다같이 산촌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농촌의 미래에 희망을 걸어보자. * 최종수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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