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You ar here   :  HOME > 설립자 류태영> 수필원고

수필원고

47세에 교수가 된 성악가_류태영 박사의 VISION 이야기(4)
08/06/13 15:52 | 이명희 | 조회 4708 | 댓글 1
47세에 교수가 된 성악가_류태영 박사의 VISION 이야기(4)

류태영 박사의 VISION 이야기(4)

47세에 교수가 된 성악가


히브리대학 사회학박사
건국대 부총장 역임
농촌․청소년 미래재단 이사장

기나긴 기다림에 지쳐
이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은가?
자신이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라.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라.
내가 가고자 하는
인생의 방향이 정해졌다면
목적지를 향해 액셀을 밟으라.


L은 이태리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내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성악가였지만 교수 임용시험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그의 나이 47세, 현실적으로 대학전임 자리를 꿈꾸기에는 불가능한 나이였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서 주위 동료들은 이미 대학교수 자리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니, 성악의 길을 서서히 떠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황폐하게 서있는 공사장의 철 구조물이 내다보였다. 일 년 전에 화려한 청사진을 가지고 시작된 빌딩공사였다. 그러나 건설회사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공사는 중단되고 철 구조물은 더 이상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비바람에 삭아 녹슬어가고 있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 쉬었다. 남들에게 비친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마치 저 부도난 공사장의 녹슨 철 구조물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에 그의 인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하릴없이 늙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늘 될 듯하던 대학교수 자리는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점심비와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지방대학 강사 자리가 고작이었으니까.

몇 해 전이었다. 모교 은사였던 최 교수로부터 저녁에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집에 가니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진 K대학의 음대 학장이 와 있었다. 최 교수와는 형제처럼 지내는 막역한 사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그를 학장에게 소개해주었다. K대학에서 마침 성악과 전임강사를 구하는 중이었다. 최 교수는 그 자리에서 L을 믿을 수 있고 실력 있는 테너라고 칭찬하며 학장에게 적극 추천을 했다. 학장은 몹시 마음에 든 듯 아주 흡족해하며 말했다.

󰡒실력보다 먼저 인간성입니다. 난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성만 좋으면 뽑으려고 하는데 서류만 가지고서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잖아도 여기저기 마땅한 사람을 알아보고 있던 참인데 마침 최 교수가 당신을 추천하니 아주 마음이 든든하군요.󰡓

학장은 그에게 실기시험 때 부를 곡에 대해서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어려운 곡보다는 잘 알려지고 화려한 곡을 부르세요. 이번에 당신 아니면 아무도 안 뽑을 테니까…. 실기시험이나 잘 준비하도록 하세요.󰡓

다음날 L은 이력서와 증명서 등 준비서류를 가지고 K대학 학장실로 찾아갔다. 찬찬히 서류를 살피던 교수가 문득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귀국한 지 7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독창회를 한 번밖에 하지 않았네요?󰡓
󰡒경제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태리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죠?󰡓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이태리에서 관광 가이드를 하며 유학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학자의 얼굴빛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학장의 안색을 풀어줄만한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표정이 변해버린 그에게 충분한 사례를 하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며칠 후에 치른 실기시험은 그를 떨어뜨리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 후 절차만 달랐지 거의 이런 식이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돈도 인맥도 집안 배경도 좋지 못한 그는 어쩌면 진작 대학교수 자리를 포기했어야 옳았는지 모른다.

사실 그의 목표는 대학교수가 아니었다. 그의 꿈은 오로지 󰡐죽을때까지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아이의 아버지인 가장으로서 경제적 현실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일주일 내내 지방대학을 비롯한 네 군데의 대학을 시간강사로 뛰어도 두 아이 학원비도 부족했다.

테너 중에서도 비교적 서정적인 음색을 지닌 그는 오페라에서 로돌포(푸치니의<라보엠>주인공으로 시인)나 만토바 공작(베르디의 <리골레토>에 등장하는 바람둥이),네모리노(도니제티의<사랑의 묘약>주인공으로 막대한 유산상속자가 됨)등의 배역을 맡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하루하루 점심 값과 교통비로 간신히 살아가는 가난한 일용 노동자일 뿐이었다. 주위 동료들은 이미 성악의 길을 떠나 다른 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이제 베르디나 푸치니 같은 이름들과는 결별하고 대신 이태리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해보자는 제의도 들어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빠듯한 생활비를 떼어내 붓던 적금도 해약하고 처가에서 간신히 마련해 준 주책청약 부금마저 해약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해약할 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있다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노래를 하겠다󰡑는 꿈을 해약하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이 현실 앞에서 강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자기의 길을 계속 가기로 결심했다. 돈은 언젠가 벌 수 있고 적금은 다시 들 수 있지만, 꿈은 해약하면 영영 다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강사 자리를 늘려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일주일에 여섯 군데 강의를 하고, 출연료 액수와 상관없이 국내 크고 작은 연주회는 물론 해외 정기 연주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성악가로서의 본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일날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열심을 다해 섬겼다. 동시에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고 신뢰했다.

2006년 새 학기를 한 달 앞둔 2월 초, ○○국립대학교로부터 기적 같은 연락이 왔다. 그가 쌓아온 꾸준한 음악활동과 연주경력, 실력 등을 인정받아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임용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동료와 후배들이 달려와 진심으로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마흔 살이 넘으면 교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지레 포기했던 후배와 동료들이었는데 그의 합격소식에 그들도 희망과 용기를 얻은 것 이다.

그는 단지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제 정말 죽을 때까지 노래할 수 있는 꿈을 이루게 되어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현재 거의 모든 시간을 음악과 함께 지내고 있다. 시간과 몸이 허락하는 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는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을 것이라고 한다. 이제 인생의 무대에서 자신의 꿈을 노래하는 진정한 삶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인생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이다. 인생의 배역은 연봉이나 지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진정한 프리모, 프리마돈나는 현실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기나긴 기다림에 지쳐 이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은가? 자신이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라.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라. 간절히 원하면, 정말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일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은 영적원리이기도 하다. 원하는 일이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내가 가고자 하는 인생의 방향이 정해졌다면 목적지를 향해 액셀을 밟으라. 비록 막힐 때도 있고 돌아갈 때도 있고 더디 갈 때도 있지만 그 꿈을 잃지 않는 한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이나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몰려올 때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 희망은 당신의 부서진 꿈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벼랑 끝에서 날아오르게 할 것이다.


2008/05/17 경기복지뉴스
댓글 1
수정   삭제   답글 박혜정  |  13/04/20 01:44
언제나 마음을 울립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답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