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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원고

꿈의 정립과 실천만이 성공을 부른다
08/02/22 20:14 | 이명희 | 조회 3685 | 댓글 0
 

꿈의 정립과 실천만이 성공을 부른다

- 농촌·청소년 미래재단 류태영 박사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물질이 넘쳐나는 지금의 우리 청소년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우리나라가 후진국 중에서도 후진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쟁의 소용돌이 말려버린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못 사는 나라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과연 우리에게도 선진국과 같은 미래가 올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의 상황. 이 같은 국가의 낙후된 경제 상황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의 우리나라를 특징짓는 중대한 사건으로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마을 운동 중심에 ‘류태영 박사(74세)’가 있었다.


류태영 박사는 그야말로 한편의 소설과 영화와 같은, 정말 믿기지 않는 인생을 살아온 이다. 가난하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유년·청소년 시기를 거쳐, 현재 세계가 인정한 성공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꿈을 잃지 않는 청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류태영 박사를 만나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현재의 청소년 및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았다.


# 가난했지만 꿈과 희망으로 자랐던 청소년기


1935년생(호적상 36년생)인 류태영 박사는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고향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 곡식이 없어서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로 식사를 대신하기도 하고,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채 촌에서 지게 지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가곤 했다는 류태영 박사. 힘든 생활임에도 오직 성실함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그에게 중·고등학교 입학에 이어 덴마크 유학을 가기까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 유년기를 생각하시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그때는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힘들게 일만 하셨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식구들의 밥을 다 먹일 수가 없었죠.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두달 동안 쌀이나 보리, 수수 등의 곡식을 한 톨도 입에 넣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당시에는 정말 밥이 없어서 산에 가서 송피(소나무 껍질)를 벗겨다가 삶아서 도토리가루나 수수가루 등을 섞어 납작하게 호떡같이 만들어 먹기도 했었죠.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는데 제 동생들이 학교를 다닐 때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돼서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형과 누나들은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로 집이 가난했습니다. 저 또한 입학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학교를 못 가고 있었는데, 1년 후 아버지께서 큰 마음을 먹고 학교에 입학을 시켜주셨죠.


▶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바로 못 가셨다고 들었는데요.


네. 중학교까지는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었던 거죠.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일을 해야만 했었죠. 산이나 들에 지게를 지고 일을 다니기도 하고 남의 집 논·밭 일을 돕기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중학생들을 보면서 ‘왜 나는 학교를 가지 못하고 일을 해야만 하는가’하는 생각에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집에서 3년간 독학하기도 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한 청소년을 위해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수업을 하셨는데 그곳에 다니기도 했지요. 그러다 18세가 대던 해에 읍내에 중학교가 생겼는데, 어머니가 읍내에서 제일 잘 사시는 분을 알게 되어 그곳에서 테스트를 받아 10살, 8살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놀아주는 등 말하자면 입주가정교사를 하는 조건으로 그 집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됐죠.


▶ 서울에는 어떻게 올라오시게 됐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동네에 고등학교가 없었죠. 그래서 어머니에게 차비를 해달라 해서 6·25 직후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올라오기는 했는데, 서울에 연고지도 없어서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갈 때가 없었죠. 결국 여름에 길거리나 기차역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때 대방전철역 앞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 고향사람의 소개를 받아 미군 부대 안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부대 안 천막 안에서 잘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던 중 고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이미 입학시험과 등록이 끝난 것은 물론 개학한지 한 달이 넘어버린 시기가 되었죠. 서울에 올라온 이유가 공부를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간 곳이 노량진에 있었던 동양공업고등학교였는데, 이미 개학한지 한 달이 지났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죠.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에 교장선생님께 무릎 꿇고 울면서, 고향에서 힘들게 중학교까지 다니다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는데 연고지가 없어 미군 안에서 구두닦이를 한다고. 그래서 입학 시기도 지나고 입학금도 없고 등록금도 없지만 입학만 시켜주시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월사금도 잘 내겠다고 약속을 했죠. 저의 부탁에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 서울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학교이기 때문에 생활이 힘들더라도 졸업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월사금을 내기 위해서 밥을 굶기가 일쑤였고, 그것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죠. 구두닦이는 기본이고, 쓰레기를 주워다가 팔기도 하고 방학동안에는 행상을 하는 등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힘들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도 야간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죠. 대학교에 가서도 신문배달을 하다 공장청소부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공장이 부도가 나서 월급도 받지 못했었죠.



# ‘꿈’이 있었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아


아무것도 가지질 못했고, 가질 수도 없는 상황임에도 류태영 박사는 삶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농촌을 살리고 못사는 대한민국을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 밝은 미래를 선사해 주자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 덴마크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우리 아버지가 하루종일 일을 해도 식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없었던 것, 그것이 우리나라 전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제도적으로 농민이 노력한 대가를 충분히 가져가지 못한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국가와 사회적으로 전체가 못 사는 시스템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시스템을 고쳐 가난한 농촌이 잘 사는 복지국가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것이 제 어릴적 꿈이었습니다.


유학을 가게된 것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미군에서 처음으로 ‘유학’이라는 말을 들은 후로, 그냥 막연하게 유학을 가서 농촌을 살리는 복지국가 시스템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유학을 가고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느 나라, 어떤 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52년도에 유달영 박사의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보게 됐습니다. 덴마크의 가난한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가 되는 과정과 그 이야기를 쓴 책이죠. 이를 계기로 덴마크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생기게 됐죠.


▶ 유학을 가시게 된 것도 특별하다고 들었는데요.


덴마크에 가야겠다는 결심은 굳혔는데, 어떻게 가야할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덴마크에 아는 사람도 아는 대학도 없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가장 높은 사람에게 편지를 해서 내 뜻을 전하자는 생각을 하고 도서관으로 가서 백과사전을 보고, ‘To. 프레드릭 9세 임금님 귀하’라고 써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영어 문법도 잘 맞지 않는 편지였지만 간절한 뜻을 전하기는 이 방법밖에 없다 생각을 한 것이죠. 놀랍게도 20여일 후 덴마크 왕궁 사무실에서 회답이 왔습니다. 프레드릭 9세가 제 편지에 감동을 받아서 도와주고 싶다는 편지였죠. 그렇게 덴마크에 유학을 가서 3년간 지원을 받아 공부를 한 후, 이스라엘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곳에서도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에 있는 국제연수원에서 실무공부를 하게 됐었죠.


▶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셨는데요. 우리 청소년들은 교과서에서만 접해봤지 정확하게는 어떤 운동이었는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은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너무나도 가난한 농촌 생활이 주류였던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면 일어나서 선진국에 이를까 하는 문제를 푸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아시아에서 제일 못 살았던 나라가 아시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당시 세계 177개 나라 중 170위를 기록하던 우리나라가 17번째로 잘 살게 됐죠. 지금 청소년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못 산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을 바꾼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 청소년들이 새마을 운동을 통해 어떤 부분이 변화되었나요?


청소년들도 노력을 했지요. 4H 운동이라고. 농촌청소년협회가 조직되고, 단계로 해서 배우고 가르치고 개발하는 운동에 열심히 참여를 했지요.


▶ 당시에는 새마을 운동이 있었다면 2008년 현재에 필요한 개혁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새로운 세대에 맞는 새로운 국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새마을’이라는 말 대신에 ‘새국민 운동’, 이랬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으로는. 하지만 ‘국민 운동’이 거부 반응들이 많고 실패한 일도 많아 가지고 좋은 말이 없는가 지금 생각 중이에요. 정신운동, 즉 국민들에 의식, 가치관 적립을 통한 새로운 삶의 자세 캠페인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 교육정책, ‘차이’를 인정하는 교육되어야


이스라엘 교육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인 류태영 박사는 현재 변화를 앞두고 있는 새정부 교육정책에 대해 우선은 찬성을 의견을 내보였다. 교육정책의 문제점과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류태영 박사는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 새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주 잘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정책은 잘못된 부분이 많았죠. 그동안에는 ‘이념’에 의한 교육을 해왔습니다. 평준화가 우리 교육을 10년여간 멍들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일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아이큐가 높고 천성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을 위한 학교 등을 만드는 뒷받침이 수반되어 할 것입니다. 사실 4년간 같은 대학의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해보면, 전공 공부는 물론 관심있는 분야의 공부와 함께 동아리활동, 학회활동 등 바쁘게 대학생활을 보내는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학교는 왜 들어왔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명함만 대학생인 이들도 많죠. 이러한 상황은 서울대나 3류 대학이나 어디든지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학업에 정진해 가는 학생에게 ‘공부 좀 쉬엄쉬엄 놀면서 해라’라고 한다면 그 누가 박수치면서 잘했다고 하겠습니까. 실력과 성실함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안하고, 계속 저만큼 앞에 있는 사람보고 가지 말라고 붙잡고만 있다면 분명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약간은 과격한 표현일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이 이러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새정부 정책은 공부를 잘 하는 청소년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못 따라 가는 청소년을 더욱 부추겨서 잘 할 수 있도록 밀어 올려주는, 선진국의 교육철학으로 새워진 정책이라 좋다고 생각합니다.


▶ 반대로 생각해보면, 강남과 강북의 교육수준이 차이가 나듯이 서울과 지방의 수준은 더 심할텐데요. 교육이 낙후한 지방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은 더 분리하지 않을까요?


분리하죠.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혹자는 10여년 전만도 교육정보 등을 잘 알 수 없고, 선생님들조차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자신의 능력부족에 대한 변명일 뿐 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자라던 5∼60년 전에는 더 기회가 없었겠죠. 기회도 없고, 희망도 없고, 진로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류태영이 어떻게 뚫고 나왔을 까요. 정부에서 끌어줘서? 선생님이 인도해줘서? 재벌이 후원해 줘서? 모두 아닙니다. 그야말로 삶에 희망 자체도 없었지만, 강한 의지와 가치관의 정립을 통해서 그러한 최악의 상황을 뚫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칠이 운명론에 대해서 쓴 것을 잠시 빌리자면요. 아무것도 없었던 무(無)의 류태영도 지금 이렇게 해 냈으니까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제 운명이 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영국을 살리고, 전략가이고 문학가이고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노벨상 수상 후 쓴 글에서, 내가 지금의 실력과 경험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면 지금보다 나아진 인물이 되었을 것이냐 가정했을 때 “그렇지 않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감합니다.


# 청소년이여, 꿈을 가져라!

류태영 박사는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에 청소년이 꿈을 잃는다면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잃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 비전은 꿈꾸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 70세가 넘으셨지만, 현재 바라보는 미래의 꿈이 있으신가요?


저는 어렸을 때 농촌이 잘 사는 복지국가를 이룩해 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제 꿈을 반 정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아직 다 못 이룬 꿈을 이루는 것과 청소년들이 미래에 우리나라를 이끌 수 있도록 ‘신나는 청소년’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꿈의 탑을 쌓아나갈 것입니다.


▶ 미래의 꿈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소년들은 ‘꿈과 미래’를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비전을 가지고 꿈을 갖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로드맵(이정표)을 그리고, 그리고 실천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청소년 여러분 꿈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세요!


<청소년에게 희망을 - 청소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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