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5살쯤부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셨다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민족투사의 한 분주에 훌륭하신 위인이신 것 같다. 안창호 선생님은 일생을 우리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일하신 분이시다. 그 후 24세에 학업을 목적으로 북미로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에 이민한 한국 동포들의 현실은 도저히 그로 하여금 학업에 전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끼리의 싸움을 말리고 동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분골쇄신 노력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도산은 본격적으로 미국에 있는 동포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스스로 맹세하고 그날부터 민족운동을 시작하였다. 도산은 주거 환경을 선진국과 같이 깨끗하게 하자는 청소 운동을 시작하였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적인 행동을 보이면서 미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자각심을 일깨웠다. 그 결과 민족운동을 시작한지 1년쯤 되어 효과가 나타났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항상 겸손하고 상대방보다 자신을 낮추는 인물이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때에 다른 사람들이 설득을 하여도 그는 자신을 낮추고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했다. 나는 안창호 선생님을 보면서 나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뒤에서 묵묵히 나의 몫을 했는지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낮추지도 겸손하게 나의 몫을 묵묵히 해오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란 것 같다. 참으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다른 독립 운동가는 무력적인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왜 민족의 역량 개발을 주장하는지가 궁금했다. 그 이유는 독립 국가의 민족이 되려면 그에 걸 맞는 민족 개인의 역량이 먼저 일정 수준이 되어야 그 국민은 독립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도산 선생은 이러한 뜻을 말로만 하지 않고 도산 선생님답게 대성학교라는 민족의 인재 양성기관을 세워 직접 행동으로써 뜻을 펼쳤다. 또 신민회를 조직하여 전국에 걸쳐 국민운동을 벌였다. 신민회의 조직은 비밀로 했으나, 이 단체에서 경영하는 사업은 공개적으로 했다. 대성 학교를 비롯해서 도자기 회사, 평양과 서울에 세워진 태극 서관, 그리고 이승훈에 의해 세워진 오산 학교가 그것이다. 물론 안창호 선생님을 도와준 많은 분들도 있지만 나는 안창호 선생님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모습에서 존경심을 느낀다. 도산선생은 민족 향상 운동의 근원이 될 사업으로 청년 학우회를 만들어,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 생활의 훈련에 힘쓰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고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다면 통회하라고 할 정도로 거짓을 싫어하고 멀리했다. 또 기도가 끝나고 문답에서도 안창호 선생님이 얼마나 거짓을 싫어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도산 선생의 업적을 말했지만 흥사단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흥사단은 도산 선생의 필생의 사업이자 민족 운동의 근본 이론이요 실천이었다. 또 선생은 진리와 실행과 충의와 용감의 4대 정신으로 민족성을 다시 지어보는 것이 우리 민족 부흥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동우회 사건으로 잡혀서 검사정에 섰을 때에 민족 운동을 그만둘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민족운동이요, 잠을 자는 것도 민족운동이다. 라고 하면서 조국에 대한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관한 소설을 읽으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 같은 분들이 민족운동을 하였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처럼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일은 할 수 없지만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서 할 것이다. 안창호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둘도 없는 인격자이시고 지도자이시다. 오로지 민족을 위해 한평생 희생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정신과 업적은 영원히 기억하고 따라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