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농촌청소년미래재단 13기
동산고등학교
1학년 8반 최재훈
이 책은 근현대 소설의 소설가인 춘원 이광수가 쓴 책이다. 이광수는 일본 유학 중 연설회장을 찾아다가 안창호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안창호의 늠름하고 유창한 연설과 그의 확고하게 다져진 민족관에 매료되어 그가 하는 일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광복 이후 ‘안도산선생기념사업회’의 권유로 이광수는 안창호에 대한 집필을 하게 되고 그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도산 안창호.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온 이름이다. 하지만 독립 운동을 행동으로서 보여준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보다는 많이 미흡하다. 그래서 읽는 김에 확실히 알고 가자라는 생각을 하며 읽어보았다.
안창호는 대한제국의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에 되었는데 평양지회의 결성식에서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와 18조목의 부재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서울 종로에서 이승만, 이상재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또 1년 뒤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1년 뒤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해 미국에 살던 한국인 동포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고 그들의 의식을 계몽하는데 힘을 썼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듬해 귀국하고 귀국길에 일본 동경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나라 유학생들을 만나 국내 정세에 대한 정보들을 얻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귀국 후 그는 신채호 등과 신민회 등 많은 조직들을 조직하고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었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그곳의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를 열었다. 이곳에서 대한의 독립을 위해 영농과 군사 양성을 기하기 위한 회의를 했고 독립운동근거지 건설 계획을 검토하던 중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폭탄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 되었다. 2년 6개월 뒤 가출옥한 그는 지방 순회 뒤 평안남도에 은거하였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힌 그는 수감하던 중 병보석 되었고 다음해 3월 간경화증으로 사망한다.
안창호는 독립 운동에 더해 우리 민족을 깨우치기 위한 교육과 계몽에도 부단한 노력을 기했다. 그는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을 일깨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의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해서 민족적인 혁신을 불러오는데 핵심이 있었다. 그는 민족혁신은 자아의 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하며 인격적인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런 자아혁신은 자기 개조로 연결되며 자기 개조는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정신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무실은 그는 특히 무실, 역행을 강조하였는데 이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교육사상은 학교 건설과 흥사단 운동을 통해서 뚜렷이 들어난다. 안창호는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 등 3개의 교육기간을 설립했고, 이 중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인 안창호의 교육이념이었다. 또한 흥사단 창립 당시의 약법을 보면 정의돈수를 통해 인격을 육성한다는 교육목적이 제시되어 있다. 한편 그는 교육방법상의 원리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근본원리 및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진리의 등불은 곧 성실이라 하였으며, 거짓 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과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실이야말로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적 원리라 보았다. 또한 그는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점진공부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자신의 생활은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자는 것으로 이는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의 원리가 된다. 그의 이러한 점진주의적인 사고는 학교설립의 순서에도 나타나는데, 점진학교 설립 이후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물을 기른다는 정신을 나타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사실 8월 15일 광복절이다. 광복절을 맞아 오전에 중학교 때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서대문 형무소를 갔다 왔는데 그 뒤에 글을 쓰니 왠지 더 숙연해진다. 안창호 선생님같은 독립 투사들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일본어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피가 우리의 현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