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
지난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청소년 미래재단의 류태영 박사님이 <도산 안창호> 책을 주셔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늘 배워왔기 때문에 쉽게 읽어내려 갈 것 같았는데 정작 책을 펼치자 딱딱한 전기문이라서 어려운 한자도 많고, 내가 알고 있었던 내용보다 훨씬 깊은 뜻이 숨겨져 있어서 꽤 오랫동안 책을 잡고 읽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만약 이 책을 읽지 않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단순히 독립운동가라고만 알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부끄럽다.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항일 독립 투사이자 교육자이며 연설가, 또 신앙인으로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국민 계몽 운동에 바친 인물이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 속에서 청일전쟁을 겪으며 조국에 힘이 없음을 자탄하였다. 그 이후 소년 안창호는 나 자신이 먼저 덕있고 지식있고 애국심있는 국민이 되어 나라의 힘을 길러야 것을 깨닫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도산은 신학문을 배우면서, 힘든 유학 생활에도 스스로 먼저 실천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재미 한국인을 보호하고 단결시키며, 그들이 세운 공립협회를 미국정부가 인정하는 공익기관으로 키우는데 이바지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온 도산은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대한 매일 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뛰어난 연설로 신지식인의 융성과 애국 우국의 결의를 민족에 퍼트려 나갔다. 또한 평양 대성 학교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 정신으로 하는 흥사단을 조직하여 여러 가지 공개적인 사업을 통해 민족 운동의 인재, 국민 교육의 사부를 양성하자는 뜻을 넓혀갔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대한인 국민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되어 활동하였다. 도산의 이러한 힘에서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는 단지 운동뿐 아니라 `신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3.1운동 이후 도산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서 임시 정부에서 내무총장직을 맡아 활약한다. 그는 재외 동포의 부력과 문화의 힘이 향상되면 그것이 곧 독립의 실력인 동시에 진정으로 독립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러한 도산의 생각을 훗날 간디의 무폭력 평화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무력이 아닌, 행동을 밑받침해주는 정신과 문화의 힘으로 진정한 자주독립을 외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품은 뜻은 1931년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 공원 폭탄 투척 의거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면서 꺾이고 만다. 옥살이를 하면서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출옥하여 숨어 살다가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다가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안창호 선생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책으로 만나면서 가장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도산은 뛰어난 학문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뒤늦게 공부에 뛰어들었지만 공부의 위대한 힘을 알고 그것을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준 학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공부를 함으로써 민족을 이끄는 인재를 양성하고 국민에서 애국정신을 불어넣어 우리나라를 바르게 인도해 주셨다. 그의 모습에서 나를 비춰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훨씬 풍족하고 편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안일한 생각으로 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이번을 계기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애국자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회가 발전하고 국민의식이 성장한 오늘날,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도산이 그리던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얼굴`의 새 민족의 얼굴을 갖추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 최종수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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