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효문화>류태영 박사의 삶의 지혜 이야기(24) | ||
노인들 입장을 보면 여러 표정이 엿보인다. 처음부터 자리같은 것은 포기하고 출입문쪽 구석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기어코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듯 그 혼잡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양보할 만한 젊은이 앞에 서서 눈치를 보는 노인도 있다. 안면 몰수하고 아무데나 쑤시고 앉아버리는 노인도 있고, 적극적으로 권리주장을 하는 노인도 볼 수 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여보게, 자리 좀 양보하지 그러나?” 노인의 이 말에 젊은이가 곧 양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무슨 말씀이세요? 노약자 지정석은 괜히 만들어 놓았습니까? 불편하시면 그리로 가면 될 것 아닙니까? 나, 원 참.” 아주 손쉽게 결판이 났다. 나만 망신이라고 생각 했는지 노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젊은이만 노려보고 있는데 옆사람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사건은 끝났다. 노약자 지정석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학생처럼 보이는 한 아가씨가 그 노약자 지정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한 노인이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인지 그 학생 앞에 섰다. 그러나 말이 떨어지지 않는 지 한참 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 후 노인의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년아, 너는 어른도 눈에 안보이냐? 어디 어른 앞에서 감히 다리를 꼬고 앉아. 당장 내리지 못해?” 내 귀를 의심도 했지만 분명이 욕설은 정장까지 한 노인의 입에서 튀어 나오고 있었다. 차 안엔 갑자기 긴장이 감돌았고, 모든 시선이 그 학생에게로 향했다. 학생은 너무 황당했는지 다리를 내릴 생각도 않고 눈만 똥그래져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이 년이...어서 못 내려! 너 어느 학교 다니냐? 못된 년 같으니라구.” 갈수록 노인의 입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학생도 지지 않았다.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댁이 뭔데 이래요? 그럴 기운 있으면 댁의 딸한테나 그러세요. 어디다 마구 욕설이에요, 욕설이…누가 늙으라고 그랬어요?” “뭐라구? 그래도 이 년이 입은 있다구...어디다 함부로 나불대는 거야, 엉?” 상황은 점점 험악해져 갔다. 노인은 폭력까지 행사할 태세였다. 그러자 주위에서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노인을 만류했다. 그리고는 학생을 달래어 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 후에도 노인의 욕설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사안의 옳고 그름을 떠나 요즈음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꾸짖을 때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전철 안에서 소란을 피우던 청소년을 꾸짖던 사람이 그 청소년들로부터 무수히 구타를 당해 인사불성이 되었으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제자가 스승을 폭행하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다니던 중학생을 야단치던 노인이 봉변을 당하고, 대학교수가 아버지를 죽이고…. 본디 한국 사회는 대가족 사회요, 공동체 사회였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품앗이를 했고, 어른이 길을 갈 때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 드렸다. 어른들은 불량하게 노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자기 자식처럼 꾸짖고 타일렀다. 경제수준이 한국의 두 배나 되는데도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어른들을 공경한다. 노인이 버스를 타면 반드시 자리를 양보한다. 눈치라도 보고 앉아있으면 워낙 간섭하기 좋아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온갖 꾸지람과 눈총을 받아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노약자 지정석도 경로석도 없다. 그러나 모두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예의도 극진하다. 그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토대는 아무래도 성경의 ‘십계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십계명의 처음 네 계율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이 지켜야 할 율법으로 되어 있다. 바로 그 다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규정인 다섯 번째에서 열 번째 계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언급되는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다. 철저하게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유태인들에게 이것이 미친 영향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통해 교육을 받는다. 일상생활의 자연스런 대화도 많은 부분이 종교적인 예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라든가, 왜 신이 모세에게 계시를 내렸는가 등의 예화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도덕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굳이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부모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에게 받은 게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돌려줄 생각을 말고 네 후손에게 물려주어라.” 한번은 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거니?” “예, 저를 위해 합니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를 위해서 한다니, 그게 무슨 뜻이니?”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효도하면 큰 축복을 내린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효도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교육의 ‘敎(교)’자도 ‘孝(효)’자로 시작된다. 아마도 효도가 모든 교육의 근본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글_류태영 박사(히브리대학 사회학박사, 건국대 부총장 역임, 농촌청소년 미래재단 이사장) (2007.1.20.경기복지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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